편집자가 하는 일

#15 쓰는 시간

by 힐데와소피
편집자는 독자의 대표다


작가의 숙명이 불안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혼자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는 그래서 독자를 찾는다. 독자는 작가가 기쁨과 절망 중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사람이다. 좋은 나쁘든 간에 이런 확신은 작가에게 엄청난 무기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더욱 선명한 글쓰기가 가능해지므로.






힐데와 소피는 그런 확신을 서로가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글을 봐주고 고치다 보니 어느 문장 하나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한 사람이 덧대어 놓은 문장을 이내 다른 사람이 헤집어 놓곤 했다. 둘이서 이렇게 씨름하다 보니 가끔씩은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졌다. 패턴을 끊어 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기 가장 필요한 사람은 '요룬'이었다. 요룬은 힐데의 오랜 친구였다. 요룬은 힐데만큼이나 똑 부러지는 목소리에 자신의 입장이 확고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적당한 거리감도 절묘하게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요룬은 당연함과 당연하지 않음의 경계를 합리적으로 구분할 줄 알았, 힐데는 똑똑한 요룬이가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방식을 늘 신뢰해왔다.


힐데는 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진행상황을 요룬에게 공유했다. 사실 요룬의 조언은 이미 원고에 반영되어 있었다. "통일에 찬성하시나요?"라는 책의 첫 질문은 2019년 3월 서울 모처의 북카페에서 나눈 요룬과의 대화에서 그 단서를 얻었다. 맨 처음에 힐데와 소피는 6가지 통일 방안을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기획했는데, 요룬은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입장이 먼저 있고 그 입장에 맞춰서 근거들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요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힐데는 통일 반대, 소피는 통일 찬성이란 입장이 있었던 것처럼, 각자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렇듯 힐데가 문제를 너무 분석적으로 접근하거나, 소피가 문제를 너무 컨셉에만 매몰되어 바라볼 때, 요룬은 둘 사이의 적당한 균형점을 찾아 주었다.






힐데와 소피는 요룬에게 원고를 넘기기까지를 "1차 원고" 마감이라 정하기로 했다. 물론 요룬에게 원고를 보냈을 때도 힐데와 소피의 고민이 끝나지 않은 지점들이 군데 군데 남았다. 원고를 한창 읽던 요룬은 귀신같이 그런 지점에서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데?"라고 둘에게 물었고, 힐데와 소피는 글을 쓸때에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거나 다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기억 저편에서 꺼내 이야기했다. 둘의 구구절절한 설명을 진지하게 듣던 요룬은 갑자기 어떤 포인트에서 목청을 높이며 "그럼 너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고, 너가 말하는 건 이런 거네", 흡사 사또 나리같이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 확실히 요룬은 상대방이 말에서나 글에서도 명료하지 못한 문장을 분명하게 바꾸거나, 맥락이 어지럽게 흩어진 단락을 분해서 다시 깔끔하게 재조립하는데 소질이 있었다.


힐데와 소피는 요룬과의 대화를 하면서 크게 2가지 수정 사항을 정하게 됐다. 하나는 본문의 서술 방식을 설명과 의견으로 구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가적인 설명 박스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애초의 1부 원고는 크게 질문과 설명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구조상 독자는 A와 B로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본문 내용을 읽으면서 단순히 문제가 흑백논리식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힐데와 소피는 해설 부분에서 최대한 중립적인 시각으로 사실을 다루면서도 다양한 입장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요룬은 사실과 의견이 섞여 오히려 혼란스럽다는 감상을 들려주었다. 여러 사실과 의견이 논리적 맥락이 다소 떨어진 채로 섞여있다보니 전체 글의 선명도도 떨어졌다.


거기에 요룬은 둘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는데, "요즘 애들이 '고난의 행군'을 알까?"라는 것이었다. 힐데와 소피야 어릴 때부터 티비에서든 신문에서든 종종 '고난의 행군'을 보고 들어서 알지만, 지금 10대 20대들에겐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 아닌가. '소련'이란 나라가 지구에서 사라진지도 30년이 지났는데,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낯설 것인가? 요룬의 질문에 힐데와 소피는 책을 쓰면서 당연하다 생각한 지식, 전제에 대해서도 다시 의심하기로 했다. 본문에서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을 짚는 박스를 추가하기로 했다.






소피는 작가보다도 어쩔 때는 원고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요룬의 능력이 부럽기도 하면서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궁금했다. 분명 글을 쓰는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했던 사람은 작가일텐데, 왜 작가는 종종, 아니 자주 헤메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방황을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잘 보는 것일까? 한동안 골똘히 생각해보니 근본적으로 작가와 편집자(혹은 독자)가 서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 것 같았다.



작가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사람이라면,
편집자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작가를 집을 짓는 목수에 빗대어 본다면, 작가는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 온 관심을 쏟는다. 오늘은 어디서부터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지, 필요한 재료를 어떻게 구입해야 하는지, 오늘 날씨는 좋을지, 몸 상태는 어떤 지 그런 것들을 고민한다. 반면 편집자는 그런 작가의 모습을 한 걸음 밖에서 바라본다.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공구재, 일을 하는 순서, 감정 기복에 따른 일처리의 방식 등을 관찰한다. 그러다 작가의 방식이 누군가와 비슷하다거나, 어디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나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역설적으로 편집자는 작가보다 작가가 어떤 집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그의 행동을 통해서 더 잘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말과 글, 이 모두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한 방법이다. 모든 독자가 관심법을 사용하여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작가는 눈에 보이는 언어적 표현을 통하여 최대한 성실하게 "메세지"를 전달해야만 한다. 열심히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글은 그런 메세지 전달에 실패한 것이다.


어느 편집자는 교열이란 그런 실패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라 했다. 이를테면 편집자는 작가가 혼잣말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작가가 의도하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교적 가까이 작가의 곁에서 그를 바라보면서, 그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을 관찰하고 고민해주는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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