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만드는 시간
3월 11일, 인쇄소와 약속한 인쇄 감리의 날이다.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나그 소령은 파주로 향했다. 청년청 식구인 K편집자와 B디지이너는 감리는 꼭 보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그렇지 않으면 책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힐데와 소피의 경우 인쇄소에서 종이 재질과 후공정을 알아서 섭외했기 때문에 사실 꼼꼼히 챙길 사항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소피는 어리숙하게 보이기보단 최대한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여럿이 가면 좋지" 크나그 소령은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머릿수로 밀고 가는 거죠, 뭐" 힐데 역시도 살짝 들떠 있었다.
성산대교를 건너서 강변북로를 달렸다. 오랜만의 파주 방문이었다. 파주가 가까워질수록 각자는 가장 최근에 방문했던 파주를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힐데는 5년 전쯤 헤이리 마을을 방문했다 하고, 크나그 소령은 '파주는 장단콩 두부지' 라며 말을 꺼냈다. 소피는 칠팔 년 전쯤 파주출판도시를 처음 왔을 때가 기억이 났다.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는 사실만으로 설레었던 그 날의 기분이 말이다. "여전하네 여기는." 크나그 소령이 말했다. 그때랑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변화가 없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S인쇄소 건물은 파주교보문고 근처에 있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건물 사진에서 본 것보다 실제 건물은 더 커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힐데와 소피는 담당자인 Y주임을 찾았다. 그런데 전화를 해보니 외근을 나왔다며 1층의 기장님을 먼저 만나라 했다.
1층 출력실에 들어서자 메케한 종이 먼지와 기름 냄새가 훅 끼쳤다. 공장 바닥 군데군데 찢겨나간 종이들로 어수선했고, 인쇄기계는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 없다는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인쇄기장님은 2시 미팅에 맞춰 샘플 페이지를 미리 뽑는 중이었다. 기계 앞에는 <나는 통일을 땡땡합니다>의 작업 의뢰서가 붙은 것이 보였다. 책이 인쇄된다는게 문득 실감이 났다.
<나는 통일을 땡땡합니다>는 부분 5도로 인쇄를 진행했다. 5도 인쇄란 CMYK에 별색 1도를 추가한 것을 말한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청록색을 별색으로 하는 것이 깔끔하겠다는 Y주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인쇄는 워크시트, 표지, 내지 순서로 나올 것이었다. 가장 처음 인쇄된 워크시트의 청량한 색감이 긴장을 풀어줬다.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색감이 더 예뻤다. 인쇄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에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인쇄 기장님이 “이 색이 원하는 색이 맞냐?”라고 훅 질문을 던졌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소피는 할 말을 생각했다.
솔직히 소피에게 미세한 색의 차이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머리 속의 색과 작업했을 때의 색, 그리고 종이에 찍힌 색감은 분명 조금씩 다를 테지만, 눈에 띄는 차이가 아니라면 괜찮다 생각했다. 다만 그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색 조정 패널 위에 올려져 있는 샘플칩에 눈에 띄었다. 소피는 얼른 샘플칩을 집어 들고는 작업 화면에서 봤던 색과 가장 가까워 보이는 색을 찾아 가리켰다. "이런 색이면 좋겠어요" 기장님은 소피가 건넨 컬러칩을 유심히 보던지 다시 인쇄를 시작했다. 그리고 기장은 다시 “이 정도면 되나요?”라고 은근하게 물었고 '인쇄는 하면 할수록 색은 진하게 올라오니 참고하라'라고 했다. 소피는 그 말이 '지금 색은 이상해도 나중에 괜찮을 수 있다'는 말같이 들려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그래도 좀 더 진하면 좋겠어요'라고 했고, 기장은 '그럼 조금 더 올려볼까요' 다시 감도를 조정했다.
색감 조정을 위한 주거니 받거니가 몇 차례 오가다가 오케이가 떨어졌다. 그동안 감도 조정을 위해 뽑혀졌던 종이 무더기들은 기계 앞쪽 구석으로 옮겨졌다. 힐데와 소피, 크나그 소령은 이렇게 쓰고 버려지는 종이가 엄청 많았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됐다. 버려지는 종이는 서넛 박스는 너끈히 채울 만큼 켜켜이 쌓여있었다. “아니 이게 다 버려지는 건가 봐요!”라고 힐데가 놀라워 하자, 기장님은 흘끗 쳐다보니 “이정도면 조금 나온 거야”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새삼 경건해진 마음으로 남은 인쇄를 지켜봤다.
Y주임이 도착했다. 소피는 마침 Y주임에게 양장 재질을 보여달라고 했다. 지난 회의 때 샘플 책을 넘겨주고는 아직 양장 재질을 확인을 못한 터였다. 힐데와 소피는 2층 사무실로 Y주임과 함께 올라갔다. Y주임은 보여주신 책이 외국책이다보니, 그에 맞는 양장이 딱 없어서 가장 얇은 양장 종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했다. 공정 내용이 바뀐 것에 대해서 사전 설명을 받지 못한 것 같아 소피는 갑자기 당혹스러웠다.
소피: 사전에 딱 맞는 종이가 없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힐데: 그러게. 어떻게, 좀 더 알아봐야 할까?
소피: 생각했던 것보다 탄성이 좀 부족해서 걱정스럽네요.
힐데: 소피가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달라?
소피: 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일단 인쇄소를 믿어보죠..
양장에 대한 미심쩍음을 뒤로한 채, 일행은 이제 책이 나오면 보관해줄 창고를 방문하기로 했다. 파주의 창고에 계약을 해두면 나중에 온라인 서점이나 도서 도매 쪽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책을 보내기 쉽다고 들었다.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자세히 알게 된 책의 유통 과정 중 하나였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일텐데도 출판사라면 자기네 창고가 어련히 있는 줄만 알았다. 힐데와 소피는 가장 이용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서 네이버 카페와 구글링을 했고, 그 중에서 인쇄소와 멀지 않은 곳을 찾아냈다.
주소를 찾아가보니 간판이 보이질 않았다. 여기가 맞는지 긴가민가하며 도로 옆쪽 언덕을 내려다보니 책이 가득 쌓인 팔레트가 보였다. 힐데와 소피가 찾은 R창고였다. 작은 학교 체육관 같은 규모의 창고 두 곳이 언덕 아래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일행은 창고 안에 컨테이너에서 나온 직원 분들과 간단한 인사를 하고, 창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책이 쌓여있는 모습을 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책 더미는 처음이었다. 같은 종류의 책이 몇 백권 씩 뭉쳐서 쌓여있었다.
얼마 전 어느 창고에서 화재가 나서 보관된 책들이 모두 연소했다고 들었다. 창고를 직접 방문하려고 했던 것도 그 사건의 영향이 컸다. 창고를 직접 둘러고보니 바닥이 깨끗해서 왠지 안심이 되었다. '자! 이제 오늘 업무 끝!' 힐데는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가볼까? 배고프다.' 소령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조만간 이 거대한 책 더미 중 한구석에도
힐데와 소피의 책이 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