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무리하는 시간
인쇄소를 다녀오고 이틀쯤 지나서 소피는 원고의 오류를 발견했다.
책의 147쪽에 표의 5번째 열과 6번째 열의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앞부분 내용을 수정하고 난 뒤 표 부분을 수정하지 않은 탓이었다. 아득했다. 이미 인쇄는 넘어간 상태였다. 책이 나오면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지 의논했지만 책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시 인쇄할 수 있을까? 불현듯 소피는 책이 아직 제본 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는 긴급히 인쇄소에 전화해서 제본이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제본 공정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시 인쇄할 시간이 남아있다. 천만다행으로 원고는 아직 제본 전이었다. 양장 작업인지라 공정기간이 긴 덕분이었다. 시간이 있음을 확인하자, 힐데와 소피는 다시 2부 질문과 표를 일일이 대조하기 시작했다. 정말 짜증나게도 137쪽에도 오류를 발견했다. 오류가 난 것은 분통한 일이었지만 이것을 잡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어서 한편으론 너무 감사했다.
3월 24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책이 나왔다. 책은 미리 예정했던 대로 힐데와 소피가 계약해둔 창고와 텀블벅 후원자들에게 배송을 대행해줄 업체로 나뉘어 옮겨졌다. 대행업체는 바로 배송 준비에 들어갔고 이틀 뒤부터 속속 책을 받았다는 후원자들의 인증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3월 27일 새벽 2시에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텀블벅에서 후원자가 발송한 메시지였다. 내용인 즉슨 2부의 질문이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책이 나오는 동안 거의 반 불면 상태였던 소피는 간밤에 그 메일을 읽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피는 스마트폰으로 웹하드에 들어가 인쇄소에 넘긴 pdf파일을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문제는 없었다.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그래 내일 아침 제정신으로 잘 답장을 드리자며 눈을 억지로 감았다.
소피는 힐데에게 간밤의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무실에서 와서 책을 펼쳤다. 뭔가 이상했다. 137쪽의 수정이 반영되지 않았다. 마지막 조판 pdf 파일과 다르게 인쇄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정신이 아찔했다. 힐데는 얼이 빠졌고, 소피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싸함이 꼬리뼈부터 엄습했다. 소피는 수정 원고를 넘겼던 며칠 전 상황을 떠올렸다.
디지털 인쇄가 아닌 조판 인쇄는 여러 장을 한 판에 올라가 같이 인쇄된다. 그러므로 147쪽의 오류는 32면이 한 판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총 두 군데 오류는 한 판으로 인쇄될 수 있었다. 문제는 Y주임이 소피가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147쪽만 수정해도 된다고 인지했던 것이었다. 인쇄소는 한 판이 아니라 부분만 인쇄해버렸다. 오류가 다시 돌아왔다. 소피는 억울해서 화가 났다.
Y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재인쇄가 가능한지 물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알려주겠다던 Y주임은 결국 소피의 전화에 재인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왜 처음에 147쪽에만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냐면서 따졌다. 때문에 완전한 자기네 잘못은 아니라 했다. 그래도 책을 다시 가져오면 페이지 갈이를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배송이 끝난 책을 다시 인쇄소로 들고 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후원자들이 책을 부치는 비용과 다시 우리가 책을 부치는 비용을 계산하면 족히 백만 원은 넘을 터였다. 그럴 거면 책을 차라리 새로 찍는 게 나았다. 힐데와 소피는 이미 배송이 나간 책은 스티커로 수정하고, 창고에 있는 책들이라도 페이지 갈이를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Y주임은 자기 말을 뒤집었다. 자신들의 잘못에 비해 보상이 너무 커 페이지 갈이까지 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이전 제본을 다 떼어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내지 폭이 이전보다 더 짧아진다고도 했다. 돌고 돌아 최악이 된 기분이었다. 기껏 했던 수정이 반영이 안 됐다. 결국 그렇게 붙이기 싫었던 스티커를 붙이게 됐다. 주변 지인들은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스티커 정도는 괜찮다며 위로도 해주었다. 그러나 너무 중요한 페이지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꼼꼼하지 못한 편집자로 보일까 두려웠다. 이미 헤집어진 마음은 좀처럼 진정을 몰랐다. 왜 보지 못했을까. 아니 왜, 몰랐을까. 그런데 이젠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책은 쉽게 고칠 수가 없다. 무언가를 고치려면 그만큼의 비용, 혹은 그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책의 세계가 유독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많은 부분들이 책을 만드는 일과 같다. 결과물이 아쉬웠지만 제작자로서 힐데와 소피에게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 실패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며칠이 지나자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인쇄소에서 보낸 스티커를 수령하고, 후원자들에게 보낼 편지도 만들었다. 아쉬우면서 홀가분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Y주임이 아니라 힐데와 소피,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잘하자고 마음 먹는다면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