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Happens to Me.

전주한벽문화관 우수작품시리즈[CELLIST JINHO HONG]

by 쓰는 사람 지민

2024년 5월 18일 전주한벽문화관 우수작품시리즈[CELLIST JINHO HONG] 공연을 기록합니다.



먼 지역으로 공연 관람 차 다녀온 후 컨디션이 급격히 안좋아졌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니 선뜻 공연를 예매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지난번 공연의 감동이 깊었다. 그 여운에 다시 음악을 듣는다면 마음에 남은 떨림이 더 오래 지속될 것 같았다. 마침 취소표가 났고 기차편도 운 좋게 맞아 무사히 전주에 갈 수 있었다.


전주는 몇 년 전 특수학교 전공과 학생들과 함께한 현장체험학습으로 처음 찾았던 곳이다. 분명 한옥마을을 걸으며 구경도 하고 학생들 사진도 많이 찍어주었는데 마치 과거의 장면과 지금의 의식이 분리된 것처럼 기억은 희미했다. 역시 인솔자로 간 곳은 의식이 학생들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부터 전주는 내게 첼로의 선율로 각인된 도시가 되었다.


첫 곡은 Angel Villoldo의 <El choclo>. 무대 한가운데를 강렬하게 찍어내듯 시작해 마지막까지 탱고의 걸음을 옮기듯 이어졌다. 이어진 Carlos Gardel의 <El día que me quieras>는 가사를 먼저 낭독하고 연주로 이어졌다. 언어의 결이 이미 마음속에 번져 있었기에, 선율은 더욱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내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하고 / 모든 걸 잊게 하죠 /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

가사와 음악은 서로를 적시며 깊게 배어들었다.


Roland Dyens의 <Tango en Skai>는 ‘가짜 탱고’라 불리지만 그 안에는 이민자들의 애환이 녹아 있었다. 어릴 적 잠시 배웠던 탱고 춤이 떠올라 첼로의 활 끝마다 동작이 보였다. 처음 홍진호 님 공연을 보았을 때는 왈츠가 떠 올랐고 때로는 발레리노 같았는데 이날은 탱고 댄서의 동작이 포개어졌다. 음악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순간, 춤의 기억과 감각이 다시 피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이어서 들려온 Chet Baker의 <Everything Happens to Me>. 탱고와는 또 다른 결이었지만 사랑의 낭만으로 흠뻑 젖게 했다.

최문석 님의 <3월의 밤>은 재개발 지역 옥탑방에서 지내며 곧 헐릴 건물들을 내려다보며 작곡한 곡이라 했다. 재즈풍의 경쾌한 템포 속에서 젊은 날 세상을 마주하는 두려움과 음악이 주는 든든함이 교차하는 듯했다.


홍진호 님의 자작곡 <꽃핀다>는 실제로 처음 들었다. 곡의 배경 이야기를 듣고 감상하니 내 안에서도 곡에 어울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봄의 찬란한 빛을 오래 붙잡고 싶었지만 책임과 역할을 위해 무채색 공간으로 들어가야 했던 순간들.


그리고 신곡 <별을 보게 되는 순간을 사랑합니다>라는 곳을 연주했다. 전주에서 처음 선보인 곡이었다. 연주 전 낭독된 일기가 곡의 울림과 겹쳐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영화 속 인물이 별을 올려다본 뒤 화면 저편으로 사라지는 장면처럼 음악은 멀리 번져갔다.

그 곡을 들으며 나의 별빛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지방에서 살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별을 올려다보며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곤 했다.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별빛 아래 멈춰 서서 생각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시간이 너무 귀해 서울로 이사하면 이런 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시간이 남아 있을까, 생각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늦은 밤 창문을 열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밤의 향기를 맡곤 한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릴 것 같은 밤에 다시 별을 찾는다. 혹시 어린 시절 나를 비추던 그 별일까 하며.


다시 탱고로 돌아와서 Astor Piazzolla의 <Oblivion>, <Yo Soy Maria>, <Libertango>, ,Concierto Para Quinteto> 좋아하는 곡들이 한자리에서 이어졌다. 행복감이 차올라 좋아하는 연주를 이렇게 다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예전의 Oblivion은 더 슬프게 다가왔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탱고가 슬픔과 애환을 해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음악이라면 연주자의 해석 또한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리라.


앵콜곡은 최백호 님의 <낭만에 대하여>였다. 이미 프로그램 북에 적혀 있어 당황하셨다 했지만 알고 들어도 감동은 줄지 않았다. 진득한 감수성과 아쉬움의 정조가 스며 있었으나 무겁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전주천을 지나 한옥마을 쪽으로 향하는 길에 쥐똥나무가 서 있었다. 작고 하얀 꽃잎들이 수줍게 서로의 얼굴에 기대며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퍼졌지는 청초한 향기를 영상으로 담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전주 한옥마을 한복판에서도 이상하게 나는 숨이 트였다. 건물 뒤 나지막한 산자락의 나무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 보기에는 다소 이상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고요가 내겐 꼭 필요했나 보다.


5월의 전주천과 그의 하늘


첼로의 선율과 전주의 공기는 여전히 내 안에서 작은 회복의 시간을 열어주고 있다. 햇빛에 부서지던 전주천의 물빛과 길가에 스며 있던 꽃향기, 그리고 무대 위를 채운 음악, 그날 밤 바라보았던 별빛까지 잊히지 않은 채 내 삶 깊은 곳에서 반짝이며 남아 있다. 때로는 지쳐 있을 때, 때로는 스스로를 의심할 때, 그날의 기억이 내게 다가와 다시 살아가게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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