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홍진호 리사이틀 <첼로의 숲>
2024년 11월 17일 첼리스트 홍진호 리사이틀 <첼로의 숲> 을 기록합니다.
지난 11월, 〈첼로의 숲〉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한 문장이 떠올랐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속 구절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장을 열어 그 구절을 펼쳤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 문장 곁을 서성이었다. 공연은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라 오래된 문장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이었다.
<첼로의 숲〉은 내게 쉽지 않은 공연이었다. 음악 자체는 낯설지 않았으나 그것이 건드린 지점들이 문제였다. 매 챕터마다 자연주의적 질문이든 초자연적인 상징이든 내가 외면해 온 감정과 기억, 오래 눌러둔 질문들을 건드렸다.
그래서 공연 직후에는 글을 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공연장을 나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속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설명하기 힘든 피로감이었다. 마치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과제와 마주쳤을 때, 혹은 오래된 일기를 다시 펼쳤을 때 몰려오는 불편한 진실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과 피로가 공연의 진짜 여운이었다.
나는 그 잔상을 ‘첼로의 숲 이펙트’라 이름 붙였다. 공연이 끝난 뒤 두 달 동안, 이 증상들을 고루 붙잡으며 내 안의 갈등을 천천히 바라보기로 했다. 나는 기쁨이나 성취는 쉽게 기록으로 남기곤 하지만 상실이나 분노, 외로움 같은 감정은 애써 덮어두거나 삭히곤 한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통해 그 불편함을 꺼내어 내 앞에 펼쳐 놓기로 했다. 숲이라는 공간은 때로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어둠과 고독이 도사린 장소이기도 하듯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숲의 공기처럼 투명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렇듯 그의 음악이 남긴 흔적은 단순히 귀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태도까지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무대 위의 연주자를 바라보는 순간, 문득 ‘소년의 얼굴’이 스쳐갔다.
“첼로의 숲이구나. 그 소년이 자라 지금 이 무대에서 첼로를 연주하는구나.”
그에게는 오래된 기억이 있었다. 첼로 선생님의 옷깃에 묻어 있던 송진가루 냄새. 그 송진의 흔적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을 스쳤고 어린 그는 그 냄새 속에서 언젠가 숲의 향기를 품은 첼리스트가 되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오늘의 무대는 그 약속이 이루어진 장면 같았다.
비에 젖은 흙과 나무가 내뿜는 숨결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빛줄기가 한 올 한 올 흘러내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듯 했다. 그 빛과 바람은 음악이 되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도도새가 떠올랐다. 오래된 새의 냄새처럼 내 과거가 바람을 타고 되살아오는 듯했다. 시각의 기억이 후각으로, 후각의 기억이 촉각으로 번져 내 안에 묻혀 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그 기억 속에서 도도새는 숲의 길동무가 되어 춤을 추고 있었고 슬픔 앞에서도 날개를 펴며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었다. 무대 위의 음악과 영상은 과거의 소년과 현재의 연주자 그리고 과거의 나와 관객석에 앉아있는 지금의 나를 한자리로 불러냈다.
“미리 두려워하지 마, 어린 첼리스트. 사랑도 첼로처럼 매 순간 연습이 필요한 일이란다. 그 연습 속에서 너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첼로의 숲〉 프로그램 북 중-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안의 어린 내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초라하다고만 여겼던 그 시절의 '나'는 돌이켜보니 매순간 반짝이며 자기 자리를 견뎌낸 아이였다. 보이지 않았을 뿐 놓치고 싶지 않은 빛으로 존재하는 나였다.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사실 ‘연습’의 이름으로 찾아오는 것 아닐까. 준비되지 않은 채 실전에 던져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이 다음 스테이지의 리허설임을 알게 된다. 사랑도 고독도 심지어 실패조차도.
자작곡 〈첼로의 숲〉의 모태가 된 일기를 들으며 나는 그의 청소년기를 떠올렸다. 숲의 향기를 닮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고 외로움과 씨름하던 날들. 그 고독과 인내가 쌓여 지금의 음악이 되었다는 것도. 그의 첼로는 이제 녹음을 드리우고 꽃과 나무를 피어내며 새가 둥지를 트는 숲이 되었다. 위로가 자라나고 다시 살아낼 힘을 주는 숲. 그의 음악은 우리의 쉼터가 되었다.
나 역시 문득 내 일기를 떠올렸다. 그 안에는 미숙하고 불안정했던 문장들이 가득했지만 지금의 나를 지탱해온 것은 다름 아닌 그 흔적들이 있다. 과거를 지우고 싶었던 순간들조차도 사실은 오늘의 나를 살아내게 하는 힘이었음을 공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덧 ‘시접이 살짝 접힌 듯한’ 나이에 도달했다. 30대까지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골몰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누구로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젊은 날에는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했지만 이제는 온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
오랫동안 갈구 했던 '특출남'의 본질이 결국 인정 욕구였음을, 그리고 그 기대에 닿지 못할 때마다 내 안에 우울이라는 이름으로 무력감이 쌓여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른 이의 성취가 내 삶을 살려낼 수 없듯 내 보잘것없는 성취도 타인의 삶을 구원하지 못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과나 성향이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나는 이제 내 도도새를 찾고 있다. 젊은 날의 나를 용납하고 품고 안아준다.
“왜 너의 그 시절이 찬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너는 언제나 반짝이고 있었단다.”
이 문장을 속삭이듯 스스로에게 건네며 과거의 나는 비로소 현재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그 화해의 순간은 내일을 살아갈 힘으로 이어진다.
<첼로의 숲〉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음악 인생의 일대기이자 자아 성장 보고서였다.
언젠가 홍진호 님이 더 깊어진 삶의 교향곡을 들려준다면 그때도 그 자리에서 그의 숲을 다시 마주하고 싶다.
‘첼로의 숲 이펙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숲이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듯 나 또한 삶을 긍정하고 용납하며 다음 계절을 위한 숨을 모으고 있다. 음악이 남긴 잔향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책을 덮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사색처럼, 나는 지금도 그날의 숲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