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심 첼로가 좋아서, 홍진호 피아노가 좋아서>
2024년의 마지막 날 밤, <노영심 첼로가 좋아서, 홍진호 피아노가 좋아서> 공연을 기록합니다.
“2024년 12월 31일,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 애쓰셨고 감사합니다. 피아노가 도착했습니다.”
첫 음이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노영심 님의 멘트에 자연스레 귀가 기울여졌다. 그 한마디에는 지금 이 순간, 이곳까지 온 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가 담겨 있었다. 2024년 마지막 날 건네는 격려와 애도의 편지. 그들의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온 국민이 함께 참사를 겪고 있는 시기였기에 이 자리에 와준 관객들에게 전하는 진심 어린 감사도 느껴졌다.
지난 9월, 춘천문화예술회관 마티네 콘서트에서 두 분의 연주를 들었다. 그날의 음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혀끝에 오래 남는 진한 초콜릿처럼 달콤함 뒤에 미묘한 쌉싸래함이 번져 마음속 깊이 잔향을 남겼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OST를 들으며 생각했다. 특수교사의 삶도 왈츠처럼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벼운 리듬 위에서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지는 춤처럼 말이다.
그리고 갓 성인이 되어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던 시절에 보았던 드라마 ‘연애시대’의 OST는 나를 단숨에 과거로 데려갔다. 첫 과외, 첫 교생 실습, 첫사랑과 첫 이별… ‘처음’의 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였던 그 시절은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러다 물결 위에 빛이 흩뿌려지는 듯한 멜로디의 자작곡 ‘윤슬’은 마음속 켜켜이 남아 있던 장면들에 빛이 닿는 듯 했다. 나는 ‘윤슬병’에 걸린 듯 그의 음악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꼭 돌아올게. 내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차례로 나에게 와서 인사해줘야 돼.”
비스듬히 열린 문틈을 들여다보다 문지방을 넘던 순간이 떠올랐다. 누구나 그 문에 들어서지만 시간은 순환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린다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된다. 그 시절의 나는 청춘이라, 처음이라 아팠다. 그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준비하고 채비를 한 후 레일 위에 올라탔을 텐데... 내리막은 무서웠고 오르막은 벅찼다. 광야를 지나고 동굴을 지나는 시간은 외로웠다. 늘 긴장한 탓에 머리는 아프고 소화도 되지 않았으며 마음은 상처 입고 또 아물기를 반복했다. 레일에서 내릴 생각도 속도를 줄일 여유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달려왔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40대가 되어 있었다.
상처들이 겨우 아물 만하면 또 다른 상처가 생겼고 결핍이 채워질 만하면 또 다른 과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문득, 시간을 잠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기치 못했던 병가와 휴직은 내 인생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버렸다. 그때 진호 님의 연주는 레일에 오르기 전의 나를 불러왔다.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어느 영화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가 반복되며 밝고 경쾌한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진호 님은 그 곡에서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슬픔이 밀려오는 그 순간이 행복해서 계속 연습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의 '정차'는 단순히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풍경과 나를 다시 살피는 시간이었다. 계속 달려오기만 하던 내 인생의 레일에서 ‘잠시 정차’라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 듯했다. 그 짧은 정차 속에서 나는 지난 시간을 다시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비할 수 있었다.
‘지금, 만나’라는 진호 님의 자작곡과 노영심 님의 잔잔한 왈츠. 두 곡 모두 발레리나의 유려한 춤이 그려지는 듯했지만 그날은 잔잔한 햇빛이 머무는 듯한 슬프고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진호 님은 며칠 전 무안공항 여객기 사고 이후,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고민했다.
“이 무거운 시기에, 우리가 전해야 할 공연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덧붙였다.
“시간의 허들을 지나 여기까지 온 이들에게 ‘다시 걷겠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는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노영심 님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노래했다. 그것은 마치 한 장 한 장, 진심 어린 편지를 써내려가는 듯한 순간이었다. 고운 목소리에 마음이 젖고 눈물이 났다.
두 분은 각자의 의미가 담긴 곡을 연주했다. 진호 님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OST ‘플레잉 러브’를 노영심 님은 영화 <미녀와 야수>의 주제곡을 택했다. 진호 님은 ‘첫눈에 반한 순간’을 담은 곡에서 설렘을 느꼈고 노영심 님은 힘든 시기를 ‘마법에 걸린 시간’이라 여겨 그 마법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연주했다고 했다.
그리고 피아노 연탄곡 ‘학교 가는 길’. 춘천 공연 때도 들었던 곡이다. 그 당시 복직을 앞두고 “나의 발걸음도 저처럼 가볍고 신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진호 님의 무겁고도 단단한 음에 요즘 나의 마음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연주 내내 옅은 미소가 흩어졌다.
마지막 곡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제가, 앵콜로 연주된 곡은 ‘휴식을 위한 송가’였다. 노영심 님이 진호 님을 위해 작곡했고 그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두 분 모두 음악이 ‘일’이기에 “일이 휴식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의 ‘송가’는 마치 추모곡처럼 느껴졌다. 그의 연주와 말투에는 참아내고 있는 슬픔이 엿보였다. 동시에 그 예쁜 감수성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의 2024년은 제대로 꽃피우지도 여름의 녹음을 누리지 못한 채, 모든 진액을 단풍에 쏟아붓고 겨우 작은 잎사귀만 남은 나무처럼 느껴졌다. 헐벗은 가지를 마주하는 것이 민망하고 서글퍼 하루라도 빨리 2025년이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미련이 남는 이유는 결국 삶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보내지 못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그 시간을 잘 보내주자.’
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이끼를 벗겨내고 물을 붓고 부서진 마음을 천천히 복구해간다. 그래도 그동안 “글을 정말 잘 쓰고 싶어”, “말을 잘하고 싶어” 하며 애썼던 아이를 다시 깨웠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에 삼켜질까 두려워, 오히려 감정을 먼저 삼켜버렸던 그 아이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숨 쉬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안다. 상처가 남아 있다는 건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래서 미련이 남고 그래서 다시 애정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라는 것도. 보내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아프지만 동시에 살아 있음의 증거이기도 하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어요.
여기, 첼로도 도착했습니다.”
피아노도, 첼로도, 그리고 너와 나도 모두 무사히 이곳에 도착했다. 이제, 다시 2025년이라는 레일 위에 올라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