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에, 홀로 돌이켜본 추억은

"다만 아름답던 사랑뿐"

by 쓰는 사람 지민

요즘 즐겨보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다.
출연자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함께 지난 시절의 발라드를 부른다.
직장에 들어가 내 감정의 회로를 하나둘 끊어내며

뇌도 심장도 기계의 부품으로 갈아 끼운 사이보그가 되기 전의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노래들이랄까.
그 시절의 발라드를 들을 때면, 그때 멈춰버린 자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때의 내가 타자아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감성을 포기하고 이성으로만 움직이려 했던 스스로에 대한 노여움 때문이겠지. 그 시절의 노래는 감정을 복원하게 한다.


한 소년이 말했다.
“짝사랑을 끝내기 위해 나왔습니다.”
목소리는 우렁찼으나 마이크를 부여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을 정리하고자 노래를 하겠다니.
중학교 입학 때부터 지금껏 4년 동안 좋아한 친구가 있는데, 공부도 운동도 잘 못하고, 그나마 잘한다 생각했던 노래로도 그 친구 마음을 얻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이 무대를 끝으로 짝사랑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다만 그 친구의 기억 속에 오늘 무대에서 보인 모습으로 남고 싶다고.
그마저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듯, ‘추억 속의 그대’를 부르며 소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했는지 몇 번을 들어도 눈물이 날 만큼 깨끗했고, 그래서 더 슬펐다.

심사위원 누군가가 말했다.
악기이든 노래든, 뮤지션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음악을 시작하는데 그 감정을 품은 것만으로도 자질이 있다. 그리고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깊은 감성은 너무나 아팠겠지만 짝사랑하게 한 그 친구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그 말이 나의 기억과 포개어지며 오랫동안 내 안에서 유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자기 안의 결핍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블랙홀처럼 뻥 뚫린 어둠을 직면하고 돌보아야 했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보다 내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울었다.
친구였다가 연인이 된 사람들, 혹은 연인이 되기엔 너무 익숙했던 관계들은 하나같이 지나간 사랑의 이야기를 내 앞에 꺼내놓곤 했다. 그들이 내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보다 그 마음 안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은 그림자가 보였다. 이해하려 애썼지만 반복되는 이야기는 서서히 내 자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비교 속에서 존재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순간들, 그때 내 안의 거울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자존감 높고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겠지만, 전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상처가 덧났습니다.”


언젠가 내 곁에 올 사람이 지난 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 옆을 지켜준 옛 연인에게 감사할 수 있을 것이란 말과 함께. 그 말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고백이었다. 그 후로 내 마음은 조용히 비워졌다.


‘상처는 힘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열등감이나 결핍이 동력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은 없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상처는 채 치유되었는가, 용서는 다 이루어졌는가. 그 시절 ‘멋있게’ 읊조린 고백처럼 그가 사랑했던 과거까지 이해하고 보듬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았지만, 타인 혹은 나 자신에 의해 거짓된 말들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몸이 무너졌으나 기도하듯 버티던 시간들은 결국 나를 연단한 과정으로 남았다.
울고 있던 자아를 직면하고, 용납받고, 치유하길 반복하며 나를 깎아내리던 말들은 나를 단련시켰고 사랑의 실패는 더 나은 나를 준비하게 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고린도후서 12장 9절


허락되지 않았던 기회와 거절당했던 관계가 그때는 무척이나 아팠지만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사랑의 실패가 내 영혼을 단단하게 빚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믿는 은혜의 실체를 배웠다. 이제는 아팠던 그 시절이 내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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