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자리에 묻다: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것들

베벨플라츠(Bebelplatz) 그리고 분서 기념물 「도서관」

by 쓰는 사람 지민



운터 덴 린덴 거리를 따라 걷다 보니 신고전주의 양식의 우아한 건물들이 그 시대의 위엄을 품고 서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거리에 스며들어 묘한 정적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단정한 공기를 따라가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멈춘 곳은 훔볼트 대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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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벨플라츠, 무엇이 타고 있는가

학생들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니 '베벨플라츠' 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장 한가운데 바닥에는 아래로 난 정사각형 유리창이 으스름하게 밖을 비추고 있었다. 베벨플라츠가 ‘베벨플라츠’가 되기 전부터 이 곳의 광경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성에가 끼어 선명히 볼 수는 없었지만 내려다보이는 지하 공간에는 하얗게 칠해진 빈 책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비어있는 책장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조형물은 이스라엘 예술가 미하 울만의 작품 「도서관」으로, 이 곳에서 일어난 분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1933년 5월 나치즘에 선동된 독일 대학생들은 훔볼트 대학 도서관에서 수만 권의 책을 끄집어내어 이 광장 한가운데서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하이네를 비롯한 유대인 학자들의 책들과 나치 사상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비유대계 지식인들의 저서까지 모조리 분서의 대상이 되었다. 이 광기 어린 의식은 베를린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본, 드레스덴, 하노버 등 독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었다. 그 결과 많은 문필가들은 독일을 떠나야 했으며 일부는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야만적 불길은 단지 종이와 잉크를 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성과 사유, 질문할 권리와 반대할 자유를 함께 불살라버렸다. 조형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무심한 듯 놓인 동판 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된다."

-하인리히 하이네, 1820-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의 말은 다가올 시대의 비극을 명확하게 예언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뿐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의 생명을 불태웠다.


땅을 깊이 파내어 만든 텅 빈 공간은 오욕을 덮기 위해 묻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더 깊숙이 새기기 위해 스스로 낮게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그 ‘비어 있음’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진실과 진리로 채워 넣겠다는 간절한 의지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지워진 자리에 머물러야만 비로소 들리는 진실이 있다.

텅 빈 지하 공간을 내려보다 고개를 들어 광장을 둘러보았다. 광기에 휩싸여 책을 불태우던 학생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들은 아직 자아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온전히 세우지 못한 채, 누군가가 설계한 편협한 세계관을 빌려 그것이 전부인 양 믿고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이 비극적인 장면은 교육학자 엘리엇 아이즈너(Elliot Eisner)가 말한 '영 교육과정(Null Curriculum)'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영 교육과정'이란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겨 가르치지 않은 내용을 뜻한다. 아이즈너는 "학교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배제된 지식은 학생들에게 그 세계를 상상하거나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는 유대인과 비판적 지성인들의 책을 불태움으로써 학생들이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세상을 완전히 거세해 버렸다. 무언가를 없앤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정신적 영토를 축소하고 기억의 지도에서 길을 지우는 행위다.


여기에 필립 잭슨(Philip Jackson)이 제시한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 악한 의도로 더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학생들은 교사가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학교의 풍토, 권위적인 분위기, 상과 벌의 체계 속에서 은연중에 가치관을 습득한다. 광장에서 벌어진 광기의 의식 속에서 아이들은 '타인을 혐오해도 된다'는 무언의 규칙, '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잘못된 규범을 몸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교과서의 문장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간을 지배하던 공기, 즉 혐오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교육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와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는 결국 그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와 권력 구조, 즉 '지식의 정치학'과 깊이 맞닿아 있다. 분서 사건은 교육과정이 권력에 의해 오용될 때 한 세대의 영혼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증거가 되었다.

KakaoTalk_20250522_141150658_16.jpg 미하 울만「도서관」



침묵조차 가르침이 된다.

가르친다는 행위의 무거움을 다시 생각해본다. 교사가 외면했던 질문과 애써 피했던 시선, 그리고 무심코 내뱉은 한숨이 아이들에게는 교과서보다 더 선명한 텍스트가 되어 마음에 새겨졌을지 모른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 존재의 방식과 삶의 태도를 전이시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인생의 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긴 망설임과 내적 갈등을 겪었던 이유도 바로 이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과연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 무거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교사의 삶 자체가 교육과정'이라는 윌리엄 파이너(William Pinar)의 통찰 앞에서 나 스스로를 검증하는 혹독한 시간을 거쳐야 했다.



최근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과 교육의 중립성을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교사 역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러나 교단에 서는 순간, 나의 사적인 신념이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이식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늘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선, 영향력의 문제다. 교사의 정치적 성향이나 삶의 가치관은 '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의 형태로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스며든다. 내가 침묵하는 것, 강조하는 것 그리고 분노하는 지점들을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다. 그렇기에 나의 신념은 굳건히 가지되, 그것이 아이들의 사유를 닫는 벽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교실은 교사의 확신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만의 질문을 품고 세계를 넓혀가도록 돕는 공간이어야 한다. 즉, 편향된 확신보다는 건강한 의심을 품고, 맹목적인 추종이 아닌 비판적인 사유를 키워나가는 곳이어야 한다. 베를린의 ’텅 빈 책장‘이 대한민국 교단에 서는 나에게 ’무엇을 비우고, 다시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스친다. 나의 무의식적인 편견으로 하여금 아이들이 스스로 채워가야 할 마음속 서가를 텅 비게 만드는 건 아닐까.

깨어 있어야겠다.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고 있는 것들, 그 침묵의 교육과정을 놓치지 않도록.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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