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에서> 다시읽기

우리는 모두 한때 한스였다

by 쓰는 사람 지민




다시 꺼낸 책 한 권

이 책을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오랫동안 내 서가에 기억처럼 묻혀 있었다. 수도원원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가 술에 취한 채 강가를 걷다 조용히 물속으로 사라지던 마지막 장면은 읽을 때마다 마음 한편을 서늘하게 쓸고 지나갔다. 쓸쓸하고 조용했던 그의 죽음은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잠긴 듯한 감각을 남겼다. 한스는 살아보려 애썼으나 그 애씀조차 환영받지 못한 채 세상의 가장자리로 천천히 밀려나간 누군가 혹은 나의 옛 자아를 떠올리게 했다.



헤세가 닫은 세계, 열어젖힌 문학

최근에 헤르만 헤세의 삶의 궤적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수레바퀴 아래서』는 단순히 허구나 한 청소년의 비극적 몰락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 한스에게는 헤세 자신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신학교에 해당하는 마울브론 수도원에 입학했으나 입학 7개월 만에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는 선언과 함께 학교를 탈출했고 그로 인해 가족과 교사, 사회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큰 충격과 단절을 경험했다. 이후 정신적인 위기를 겪으며 자살을 시도했고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생계를 위해 시계공장에서 실습 노동을 하며 버티기도 했다. 이 모든 경험은 『수레바퀴 아래서』 속에 스며들어 있다.

지금에야 우리는 그의 행적을 ‘작가로 성장해 가는 고통의 시기’라 부를 수 있지만 당시의 헤세에게는 매우 견디기 힘든 절망과 혼돈의 시기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한스를 통해 자기 안에 남아 있던 어린 자아를 조용히 떠나보내려 했던 건 아닐까. 그 자아를 스스로도 대견히 여기면서도 끔찍하게 지워버리고 싶었던 시절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스가 죽는 장면은 단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고통 끝에 무너져버린 ‘나의 일부’의 장례처럼 느껴진다.

나는 『데미안』이 제시하는 세계관에 쉽게 동화될 수 없었다. 그 것은 이상화된 상징과 내면의 신화를 통해 자아를 구원하려는 방식으로 보였다. 하지만 『데미안』을 다시 읽고 나니 『수레바퀴 아래서』가 훨씬 더 명징하게 다가왔다. 다시말해 『데미안』이 ‘알을 깨고 나오는 이야기’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는 끝내 그 알을 깨지 못하고 안에서 조용히 침잠해버린 자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대비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한스가 결국 자아를 분리하지 못한 채 초자아의 명령에 순응하고 원초아의 충동 앞에서 혼란에 빠져 무너진 존재임을 새삼스레 깨달게 되었다.

초자아, 이드, 자아로 구성된 심리 구조를 통해 다시 읽은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층 더 깊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데미안』과 헤세 자신의 삶을 함께 이해하면서 이 소설의 침묵이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하나의 끝맺음, 혹은 새로운 언어를 위한 고요였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헤세는 이 작품을 통해 고통받고 무너졌던 자신의 내면, 어쩌면 실제로 죽어야만 했던 그 시절의 자아를 조용히 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소설을 단순한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탄생 직전의 깊은 침묵이자반드시 지나야만 했던 내면의 사멸로 읽으려한다.



어린 날의 강가

한스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시험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의 시간이었다. 그는 강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바람의 결을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들은 그에게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세계였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빨리 그 순수한 세계를 빼앗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에 자신의 기대를 투영했고 고향의 어른들은 조용히 그를 응시하며 끊임없이 평가했다. 라틴어 학교의 선생들은 칭찬과 격려를 가장해 순응을 강요했고 질문 대신 암기를, 상상 대신 복종을 가르쳤다. 그들은 제도라는 이름으로 한스의 내면을 주조했고 소년은 자신의 본질이 무시되는 과정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집요한 폭력이었다. 그 잔인함은 체벌보다 은밀했고 그래서 더 깊이 각인되었다.



하일너, 흔들리는 거울

한스는 그 잃어버린 감각의 틈으로 스며든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강렬했고 동시에 낯설었다. 라틴어 학교에서 만난 하일너는 한스의 내면을 처음으로 뒤흔든 인물이었다. 고독하고 예민한 성정, 시를 쓰고 음악을 사랑하던 그는 위계와 규율로 이루어진 학교에서 유일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스는 처음에는 그런 하일너에게 당황해했지만 곧 강하게 끌렸다. 그 끌림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말로 옮길 수 없는 감정의 떨림이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었지만 끝내 꺼내지 못했던 세계와의 조우였다. 그러나 하일너는 제도와 충돌한 끝에 퇴학당했고 한스는 그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채 침묵했다. 그 침묵은 상실로 이어졌고 상실은 고립이 되었다.



엠마 앞에서 멈춘 마음

엠마는 공장 실습 중 한스가 마주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이미 에로스적 사랑을 경험한 흔적을 지녔고 감정에도 몸에도 자유로웠다. 순진하고 조심스러운 한스에게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보였던 엠마는 어느 밤 장난스럽게 혹은 무심하게 그의 세계를 건드렸다. 한스는 설레었지만 동시에 당황했고 그녀의 접촉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남겼다. 그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 충동에 가까웠고 그 떨림은 따뜻함보다 낯설음에 가까웠다. 그는 감정을 억제하는 법만 배웠지, 그것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아이였다. 엠마는 그에게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세계를 불쑥 열어보이곤 아무 말 없이 그 문을 닫고 사라졌다. 『데미안』식으로 말하자면, 강한 초자아로 길들여진 한에게 엠마는 처음으로 원초아의 어두운 입김을 느꼈던 셈이다. 그것은 충격이었고 균열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감정은 불안이 되었고 그 불안은 다시 침묵이 되었다. 한스는 감정이 깨어나는 문 앞에 섰지만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었다. 엠마는 그를 남겨둔 채 홀연히 그 세계를 떠났다.



낯선 리듬의 세계

한스가 맞닥뜨린 공장 생활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철저한 추락이었다. 그는 선택해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세계에서 밀려나 마지못해 굴러들어간 곳에 불과했다. 수도원 학생에서 직공의 견습생으로,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유예도 없이 전혀 다른 질서를 부여했다. 말이 아닌 손으로, 사유가 아닌 반복으로, 그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그동안 배워온 지식과 태도는 이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도리어 그는 그 지식 때문에 더욱 낯설게 비쳤고 더 쉽게 조롱당했다. 자신이 은연중에 무시해왔던 이들 사이에서 이제는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직공들은 묻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았으며 정서적 거리 두기를 일상의 기본값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유머는 날카로웠고 침묵은 무거웠다. 하루의 끝은 말 없는 맥주잔 속에 가라앉는 그들과 함께하며 한스는 그 틈에서 점점 말수가 줄었고 무엇에 웃어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가 겪는 낯설음은 단순한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이 이 세계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깊은 단절감이었다.

헤르만 헤세 역시 시계공장에서의 견습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무표정한 반복, 대화 없는 노동, 감정이 개입될 틈이 없는 작업대 앞에서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갔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그는 문장을 되새기고 생각을 쌓아가며 작가가 되어갔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그러한 침묵의 풍경에서 쓰인 문학이다. 한스가 소리 없이 작아졌던 그 시간은 헤세가 말 없이 내면에서 언어를 되찾은 시간과 교차한다.



침묵 이후, 문학 앞에서

한스는 결국 세상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자신의 안으로 천천히 침잠해 들어갔다. 그 침잠은 세상이 말하는 실패였고 어른들은 그 죽음 앞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헤세의 문학이 시작되었음을 본다. 그는 작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세워나가기 위해 먼저 죽은 자가 되어야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들을 바라보면 한스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스스로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젊은이들이 있다. 정해진 레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사회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감각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나가며 서툴지만 단단하게 그들만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들 속에서 살아남는 자아가 아닌 살아내는 자아를 본다. 더 이상 주어진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고 스스로 바퀴의 방향을 선택하려는 이들이다.

그리고 문득, 나는 이 글을 쓰며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한때 한스였고 한스를 지나온 누군가로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며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날 날을 기다렸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천천히 다시 걸어가려 한다. 그러니 이 책은 누군가의 한스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한스를 위한 애도의 문장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한스는 한동안 내 안에 머물었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아주 깊은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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