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층위를 따라 내려가며 오래된 나를 발굴하다.
때때로 아주 사소한 감각이 내면 깊숙이 퇴적된 기억의 층위를 열어젖힌다. 지난겨울 한 첼리스트의 공연을 보고 오래전에 읽었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서늘하고 고요한 안개와 선연한 슬픔이 묻어 있는 도시의 옛 모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무진은 주인공 '나'에게 고향이자 은신처이다. 결혼도, 출세도 이룬 그가 서울의 삶을 잠시 접고 무진으로 향한 것은 휴식이라는 명분 아래 숨긴 도피이기도 했다. 폐병을 앓으며 요양하던 기억, 전쟁을 피해 몸을 숨겼던 장소, 도망친 연인을 그리워하며 무력하게 누워 있던 방. 무진은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장소이자 동시에 치열하게 외면해 온 자아의 은신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인숙을 만난다. 갓 부임한 음악 교사인 인숙과 함께 밤의 논길을 걷는 순간, 그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별처럼 느끼며 잊고 지냈던 옛 자아의 얼굴을 불현듯 마주한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으나 결코 소멸하지 않은 자아와의 조우는 오래전 거처하던 방에서 인숙을 끌어안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 순간 그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백의 욕망을 품지만 결국 국어의 어색함에 밀려 그것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아내로부터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보가 도착한다. 그간 무진에서 벌어진 모든 감정과 행동이 단지 여행자에게 주어진 일시적 자유에 불과했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 현실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전보 사이에서 그는 깊은 사투를 벌인다. 그 결과로 남겨진 것이 하나 있다면 찢어버린 마지막 편지, 스스로에게 남긴 고백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여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위 문장을 곱씹으며 생각하게 된다. 그가 남긴 이 편지는 타인에게 보내는 고백이 아니라, 오래도록 잊고 지낸 자신에게 건네는 선언이 아니었을까. ‘나’는 무진을 떠나며 현실로 복귀했지만 나는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기억의 땅을 다시 찾고 싶었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에게 무진은 마주하기 두려운 자아의 무덤이었고, 그 땅을 파헤친다는 것은 곧 자기 파괴와도 같았다.
나는 오히려 그 무덤의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내기로 했다. 나의 기억 속 무진을 단지 덮어둔 채 지나가지 않기 위해 기억의 사분법을 택했다. 질서와 인내를 요하지만 조심스럽게 기억의 층위를 드러내는 일.
그 여정의 실마리는 첼리스트 홍진호의 ‘첼로의 숲’ 공연이었다. 그의 연주는 오랜 시간 평평하게 다듬어 놓은 흙 위를 살며시 스쳐 지나간 바람과 같았다. 겉보기에 단정해 보였던 그 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울리고 있는 감정의 잔향이 존재했고 오랜 침묵 끝에 조용히 외형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그의 선율이 나에게 속삭였다.
"여기, 뭐가 있어."
"이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꺼내도 괜찮아."
어느 고고학자가 쓴 글에서 본 '사분법'은 고분 발굴 방식의 한 유형이다. 고분을 발굴할 때 고고학자들은 봉분의 중심을 기준으로 정확히 십자 형태로 나눈다. 이렇게 사등분된 영역은 서로 엇갈리게 시간 차를 두고 번갈아 발굴되며, 중심을 관통하는 십자형 둑은 남겨진 채 보존된다. 이 둑은 단순히 발굴되지 않은 공간이 아니라 고분의 층위와 퇴적 상태를 명확히 보여주는 단면이 된다. 시간의 압력, 침묵의 무게, 망각의 흔적이 겹겹이 포개진 이 단면은 '시간의 절개면'인 셈이다.
사진 속 그 ‘둑’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마치 내 내면을 투시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겹겹이 쌓인 퇴적층 사이로는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슬픔의 입자, 되돌리고자 애썼던 후회의 진액, 여전히 언어화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감정의 잔류물들이 고유의 색감과 밀도로 분포되어 있다. 그 모든 층은 시간의 차이를 품고 있지만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동일한 토대이기도 하다.
나는 그 층위를 따라 나 자신을 발굴하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이 유물이고 무엇이 잔해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붓질을 멈추지 않는 한 내가 어떤 시간의 깊이 속에서 존재해왔는지를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그 발굴의 과정에서 나는 나의 젊은 날을 마주했다. 대학 시절, 학교 숲 한가운데 놓인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막연한 희망을 되뇌이곤 했다. 아직 상처받아본 적 없는 꿈들은 제법 담대했고 그 희망은 구체적이지 않아도 선명했다. 삶은 공기처럼 가벼웠고 세상은 내게 기회를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아이는 지금의 나보다 작고 여렸지만 내가 잊고 지내던 나의 어떤 본질, 어떤 단단함을 품고 있었다. 낡고 바랜 듯한 그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그 아이의 눈빛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우리 인생은 순환적이지 않고 선형적이기에 매 순간이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한 선택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내 모습이 된다. 결혼과 육아라는 사명까지 더해지면 선택과 결과는 내 의지로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잊고 보내주고 지금의 노선에 충실해야 할 것이 있고 끝내 잊지 않고 이탈하지 않아야 할 노선이 있다고.
나는 그 아이를 잊지 않기로 했다. 오랜 시간 속에 희미해질 수도 있었던 젊은 날의 꿈들을 내 안의 가장 깊은 층위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그것들은 지금의 내가 붙들고 살기엔 다소 무르익고 연약했지만, 여전히 나를 움직이고 다시 나아가게 할 이유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잊고 보내주어야 할 것들과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분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작업 자체가 이미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마음을 떠올릴 수 있고 다시 그 자리에 나를 놓아볼 수 있다.
나는 내 기억을 사분하고 그 둑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다. 한때는 부끄러워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일부와 마주했고, 이제는 꺼내어 품고 싶은 조각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그것들은 온전하지도 않고 반짝이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내 것이었고 나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각들이었다.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겠지만 삶의 퇴적 속에서 가장 진실한 나의 한 조각을 햇볕 속으로 꺼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모든 시간들이 나였음을, 그 모든 흔적들이 여전히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