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좀비의 대립은, 이내 인간끼리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평범한 일상의 보내는 주인공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난다. 초점을 잃은 하얀 눈, 쩍 벌어진 입과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는 기괴함을 자아낸다. 옷은 여기저기 찢겨져 너덜거리고, 온몸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하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라 단정 짓기 어려운 존재는 짐승의 것과 가까운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주인공을 발견한 기괴한 존재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달려온다. 이내 주인공과 추격전은 시작된다. 여느 좀비 영화에서 한 번쯤은 등장할 법한 장면이다.
좀비는 어느새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로 자리 잡았다. 인상 깊게 본 좀비 영화가 누구든 몇 편쯤 있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좀비 소재의 영화도 제법 있다. 처음엔 스릴러, 공포물 등으로 분류되던 좀비 영화는 ‘좀비물’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했다. 영화의 특정 소재가 하나의 장르로 불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좀비 영화에 대한 열광은 드라마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좀비는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했다.
좀비물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전 세계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좀비 영화만의 특정한 레파토리가 만들어졌다. 우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진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의식이 사라지며 오로지 피와 살을 탐하는 야생동물로 변한다. 고작 몇 사람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는 이내 세계로 퍼진다.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서 간신히 생존한 소수의 인간은 나름의 사회를 만들어 살아간다. 다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내 좀비와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며 영화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대부분의 좀비물이 이와 비슷한 순서로 전개되는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은 여기서 나누어진다.
그저 인간과 좀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화려하고 스릴 넘치는 액션만을 보여주는 영화는 삼류에 가깝다. 선악의 대결은 당연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예측 가능하다. 관객들은 그런 뻔한 이야기를 감상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명작이라 부르는 좀비 영화는, 이런 선악의 논리를 살짝 뒤튼다. '인간 대 좀비'로 시작한 대결은, 이내 살아남은 인간끼리의 대결로 바뀐다.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그 생존 욕구를 앞세워, 더럽고 치졸한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성과 논리, 상식이 사라지며 서로에 대한 불신과 무조건적인 혐오가 만연한다. 좀비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그저 친절한 이웃이었던 그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잘 만든 좀비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과 인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막강한 적 앞에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이해관계, 정치, 난잡한 욕망 등이 이성을 흐린다. 결국 약자간의 다툼이 시작된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한다. 인간은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다른 인간을 사냥한다. 피를 뒤집어쓴 채 서로를 죽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종국에 가서는 인간과 좀비의 구분이 사라진다. 누가 좀비이고 누가 인간인가. 그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의 대상이었던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기괴한 좀비들은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사라진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화 속 적나라한 인간들의 모습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우리도 저 상황이 되면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괜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원인 모를 바이러스와 기괴한 좀비들에 대한 공포가 아닌, 생존이 불투명한 환경에 놓인 인간들의 처참한 욕망이라는 걸 새삼 깨달으며, 우리는 영화관을 나선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가까워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그 연결 통로를 통해 전염병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순 없다. 지난 몇 년간 차별과 혐오에 대한 담론이 눈에 띄게 많이 등장했지만, 생존 욕구 앞에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마주한 건, 과거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우리들의 남루한 모습이다. 우리 사회 속 크고 작은 차별과 혐오를 지적하던 손가락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내부가 아닌 외부를 향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을 의미하던 손가락은, 이번엔 아이러니하게도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잘 만들어진 좀비 영화 한 편이, 스크린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상영되고 있다. 그런데 여긴 영화관이 아니라, 나갈 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