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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Apr 20. 2020

좋아서 돈 관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미루고 미루다 서른이 되었으니, 이제는 정말 해야겠지

   니 통장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나. K 형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화제는 단번에 전환되었다. 아뇨, 원래 올해부터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미루고 있네요. 닭 다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새빨간 양념이 골고루 묻어 있는 닭 다리는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니 2년 전에도 똑같은 말 했던 거 기억하제. K 형의 말에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회사에 입사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K 형과 나눴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돈 관리 어떻게 할 거냐는 K 형이 물음에 당시의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안 할 거예요’라고 대답했었다. 나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기라며, 푼돈을 모으기보다 책 읽고 글 쓰고 여행 다니는 데 쓰면서 내 가치를 높이는 데 쓸 거라 당당히 말했던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던 K 형의 표정까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직장인 3년 차가 되었음에도 돈 관리에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지금의 내가 되어 있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가 봐도 어이가 없었다. 스스로가.


   니는 맥주 한잔하지. 아뇨, 형도 못 먹는데 다음에 같이 먹어요. 테이블에는 후라이드와 양념이 반반씩 나누어져 있었다. 맥주를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길 만큼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테이블에는 맥주 대신 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쉽긴 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절제하고 관리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K 형과 나는 어느덧 그런 나이가 되어 있었다.


   CMA 통장이 뭔지도 모른다는 대답에 K 형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니 통장은 쪼개놓았제? 아뇨. 하나 쓰는데요... 정오야, 일단 통장부터 나눠라. 월급 통장, 생활비 통장, 고정비 지출 통장, 우선은 이렇게 나누고. 안 그러면 돈 들어오는 족족 다 쓴다. 그리고 모아놓은 돈 조금이라도 있으면 월마다 이자 정산해주는 파킹 통장 만들어서 거기에 넣어놓고. K 형은 술 대신 물을 한 잔 벌컥 마시더니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니 주택청약은 하고 있나. 네, 청년 우대형 만들어 놓았어요. 근데 관리는 안 하고 있어서... 일단 청약통장에 한 달에 10만 원씩 계속 넣어라. 그래야  분양권 당첨 확률 높아진다. 그리고 여유 되면 연금저축펀드 가입해서 돈 많이 넣고. 그러면 연말정산 때 혜택 많이 받는다. K 형은 계속해서 외계어를 쏟아 붓고 있었다.


   *


   치킨이 절반쯤 사라지고 나서야 K 형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감이 왔다. 적금이며, 이자율이며, 펀드며, 주식이며, 상품이며, 연금이며, 연말정산이며, 청약이며, 분양권이며, 담보며, 신용이며, 대출이며, 각기 흩어져 둥둥 떠다니던 단어들이 그제야 자기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한편으론 내가 그동안 돈 관리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일단은 목돈 모으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려면 통장을 쪼개야 하고, 무작정 적금 넣지 말고 이자율 잘 따져보고, 청약은 매달 꾸준히 넣고, 여유 되면 연금저축펀드에도 돈 많이 넣고. 주식은 돈 모으기 전에 절대 하지 말고. 찰떡같이 알아듣네. K 형은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이런 거 어떻게 아는 겁니까. 니 나이 때는 나도 몰랐지. 오히려 나는 너무 늦게 돈 관리해서 아쉽기도 하고.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술 한잔 안 시키고 치킨만 먹고 있는 게 눈치 보이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리. 그래도 신기하네요. 형이랑 이런 얘기한다는 게. 둘 다 나이가 들긴 했나 보네요. 야, 당연하지. 재미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니까 하는 거지. 너가 앞으로 결혼하든 혼자 살든 돈이 있어야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다이가. 주위에 보니까, 너처럼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거에 너무 무관심하더라. K 형의 말에 나와 가까운 중년 남성 두 명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쵸, 엄청 무관심한데... 그래도 자식도 낳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다 하던데요? 그럼 그분 부인이 다 알아봤겠지.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으로는 진짜 아무것도 안 된다. K 형의 말에 곧장 수긍하는 내 모습에 흠짓 놀랐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반박했을 텐데.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내가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둘 다 하지 않으면 함께 그릴 수 있는 미래는 초라하고 퍽퍽해질 수밖에 없었다. 절로 경각심이 들었다. 그래, 뭐. 좋아서 돈 관리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그리고, 나도 해야겠지. 미루고 미루다 서른이 되었으니, 이제는 정말 해야겠지. 그래. 해야지, 정말.


   *


   형 이제 일어나봐야 하죠? 어어. 와이프 카페 마감 도와줘야 한다. 운전도 해야 하고. 몇 달 만에 모처럼 만났지만, 맥주 한잔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른 테이블에는 과 잠바를 입은 대학생들이 부어라 마셔라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조용히 치킨만 먹는 우리의 모습이 사뭇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여기 스무 살 때 학과 선배들이랑 처음 왔었는데. 회상에 젖은 K 형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와, 형이 스무 살 때면... 대체 언젭니까. 10년도 넘었지. 여기 엄청 오래됐다. K 형의 말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내기 시절의 K 형이 선배들과 함께 이곳에서 부어라 마셔라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는 상상을 해보았다.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스무 살의 K 형이 있었으니, 어느덧 한 집안의 가장이 된 K 형도 있는 거겠지. 나랑 고작 네 살 차이인 형이 두 아이의 아빠라니. 스무 살의 K 형을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좀처럼 떠올리기 힘든 사실이었다. 왠지 모를 씁쓸함은, 나 역시 언젠가 맞이할 미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형, 그럼 일어날까요?

 

   홀로 지하철로 가는 길. 봄치고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문득 K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나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통장 관리를 따로 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한푼 두푼 모여 있었다. 2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하고 남은 거라 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금액이었다. 다만 초라하다고 해서 지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2년도 초라할 거라는 확신에 급히 K 형이 말한 것들을 하나둘 알아보기 시작했다. 파킹 통장 만들고, 주택청약 꾸준히 하고, 적금도 들고...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왜 진작 안 했던 걸까, 지금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냥 올해까지만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될까, 온갖 고민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코앞이라 생각했던 지하철이 유난히도 멀게 느껴졌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몸이 부쩍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현실의 무게를 이제야 느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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