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만으로 일할 수 없다

가혹한 운명을 짊어진 존재, 편집자

by 박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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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中


여기저기 메일을 보낸다. 보고서를 작성한다. 전화를 주고받는다. 회사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이것저것 물품을 준비한다고 시간을 뺏긴다. 퇴근과 동시에 다시금 행사장에 출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가끔은 택배 포장으로 반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하루 종일 미팅만 하다 끝나는 날도 있다.


연말이면 바쁜 나날이 기다렸다는 듯 펼쳐진다. 책 만드는 일보다 다른 일을 많이 한다. 그나마 조금씩 하는 책 만드는 일조차 '만들고 싶은 책'보다는 '만들어야 하는 책'이 많다. 책 만드는 일이 항상 즐거울 거라는 생각은 허상에 불과했다. 출판사에 들어오면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환상에 불과했다. 그런 순간이 영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회사는 돈이 있어야 운영된다. 직원은 돈 버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라고 월급을 받는다. 회사는 직원의 취향을 만족시키거나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 아닌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출판사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다. 출판사 역시 책을 만들어서 판매한 수익으로 돌아가는 기업이다. 편집자 역시 그러라고 월급을 받는 존재다. 만약 회사가 공익적인 목적만을 우선시하며 돈 버는 데 관심이 없다면 금방 망하고 만다. 오히려 문화예술 영역에도 애매하게 발을 걸치고 있기에 자칫하다간 이상에 빠지기 쉽다. 대표적인 착각은 바로, 좋은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만들면 잘 팔릴 거라는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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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책을 만든다. 진심을 알아준 독자들이 책을 구매한다. 책이 인기를 얻으며 출판사 매출이 올라간다. 이제 돈 걱정을 하지 않으며 좋은 책을 기획할 수 있게 된다. 저자도 어쩔 수 없이 해오던 경제활동을 그만두고 오로지 글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출판사는 좋은 책을 계속해서 만들고, 독자들이 계속해서 소비해주고, 작가는 계속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정말 이상적인 모습이다.


좋은 책을 만들었다고 독자들이 꼭 좋아해 준다는 보장도 없고,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해서 좋은 책이라는 보장도 없다. 돈 걱정 하지 않으며 좋은 책만 기획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선 돈 걱정이 가장 크다. 이러한 이유로 돈이 될 만한 책 위주로 만든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작품성은 있지만 시장 반응이 불확실한 콘텐츠에 한 번씩 모험을 해본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이상을 건드려 본다. 딱 그 정도다. 이 자그마한 부분에서 보람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편집자는 결코 이상만으로 일할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때론 모험도 할 수 있고, 승부를 봐야 할 곳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 안정적인 수익은 대체로 모험이 아닌 이미 검증된 과정에서, 오로지 독자에만 초점을 맞춘 기획에서, 현실과의 타협에서 나온다. 이상보단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 아닌, 대중들이 선호하는 작품을 기획해야 한다.


편집자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사활을 거는 존재다. 출판사 규모를 떠나, 경력을 떠나, 가치관을 떠나 이러한 지향점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상적인 생태계를 늘 꿈꾼다. 하지만 현실의 문법은 다르다. 한 회사의 직원으로서 편집자는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살아야 한다.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할 수 없다.


결국 편집자는 이상적인 상황에 놓여진 ‘덕분에’ 일을 하는 존재라기보다,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다해 일하는 존재에 가깝다.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짊어진 채, 오늘도, 내일도 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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