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것
“과거에 빠져 있으면 뭐해요. 다 옛날 일이죠.”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보면 작가, 교수, 문화예술인 등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작품을 쓴 작가라든가, 출판계에서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작품을 발굴한 편집자라든가, 엄청난 상금이 걸린 대회에서 당당하게 대상을 받았다든가 하는 분들이다.
글쟁이가 꿈꿀 수 있는 성공이 뭐 그리 특별하겠는가. 글을 써서 돈을 많이 버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명예를 얻는 것. 유명해지는 것. 미세한 부분은 다를지 몰라도 큰 맥락에선 대부분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성공을 경험했던 사람들과 실제로 가까워지거나 주위에서 유심히 지켜보면, 애초에 품었던 환상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성공에 이르는 길은 무척 험난하지만, 막상 성공 후에 오는 부와 명예는 놀라울 정도로 금세 사라지곤 했다.
C 대표님은 서울에서 20년 넘게 출판 일을 하다가 작년에 부산으로 내려왔다. 출판 경험을 살려 출판사를 직접 만들었고, 홀로 운영하고 있었다. C 대표님과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출판 관련 스터디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출판업에 뛰어든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 편집자에겐 까마득한 존재였다.
C 대표님과 출판 관련 행사에 함께 참석했다. 행사장에서 나오는 길,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9시였다. 뭔가 이대로 집에 곧장 가기에는 아쉬웠다. 먼저 ‘저랑 술한잔 하시겠습니까?’라며 패기 넘치게 말하면 될 것을, 함께 지하철을 탈 때까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내 표정에서 이러한 마음이 드러난 걸까.
-정오 씨, 오늘 밤에 별일 없으면 술한잔 할래요?
조금 허름한 술집. 생선구이와 해물탕,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처음엔 행사 이야기를 나누다 이내 출판 관련 얘기가 오갔다. 요즘 이런 책이 나오더라, 이런 아이디어 어떻냐, 이런 거 한번 같이 해보자 등, 업무의 연장 선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재미난 이야기들이었다. 1년 차 애송이 편집자가 20년 경력의 편집자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레면서도 신나는 자리였다.
소주 한 병을 금세 비웠다. 술기운이 점점 올라오며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었을 때, 나는 전부터 궁금했던 C 대표님의 과거 이야기를 조심스레 물었다. 서울에서 편집자 생활이 어땠는지, 또 어떤 책을 기획했는지 등이었다. 그러다 전혀 예상지 못한 답변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완전히 빠져들었던 판타지 소설을 발굴하고 편집을 맡은 그 주인공이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는 C 대표님이었던 것이다. 당시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 책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또래 친구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정도였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몇 번이나 읽었고,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을 정도다.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판타지 장르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설적인 작품을 발굴한 전설의 편집자가 정녕 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C 대표님이란 말인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이제 알아봐서 죄송하다고, 그 작품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영광이라 말했다.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 호들갑을 떨며 덧붙였다. 이런 내 행동이 재밌는지 C 대표님은 피식 웃었다.
- 어차피 다 옛날 일인데요, 뭐.
이런 나와는 달리 C 대표님은 무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단둘이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지만, 스터디 멤버들끼리 술자리는 자주 있었다. 그래서 C 대표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부푼 꿈을 안고 부산에 내려와 출판사를 시작했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출판계 자체가 무척 어려웠으니, 지역에 있는 출판사들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되지 않았다. 괜히 부산으로 내려온 걸까, 다시 서울로 올라갈까, 아마 하루에 수십 번은 넘게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서울에서 이른바 ‘성공’이라는 것을 이미 경험한 후에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출판 일을 하다 보면 더욱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 제가 발굴하고 기획한 책이 크게 성공했던 건 맞아요. 그렇다고 과거의 영광에 언제까지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건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건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로 다짐하는 일이다. 어쩌면 성공은 꽤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며 다음 스텝을 밟지 못하게 만든다. 성공이 주는 부와 명예 자체가 아무 의미 없고 부질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금세 사라지는 데 반해 삶은 계속 된다. 과거에 빠져 살거나 머무르기엔 삶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길고, 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C 대표님이 기획한 책은 말 그대로 ‘과거의 영광’이었다. 책이 무척 유명하고 많이 팔렸다고 해도 지금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C 대표님은 서울에서 20년 넘게 쌓아온 자신의 자산, 인프라 등을 버리고 당당히 부산으로 내려왔다. 조금은 더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이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발을 디뎠다. 자기도 한때 잘 나갔다며 과거에 빠져 살기보단 현재 운영하는 출판사에, 새롭게 기획하는 책에 집중했다. 잠깐의 성공이 아니 지속 가능한 성공을 위해, 아니 어쩌면 성공을 뛰어넘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모습이겠지.
이왕 출판계에 발을 디딘 이상, 아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편집자의 길을 줄곧 걸어갈 예정이다. 나 역시 운이 좋으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낸다든가 혹은 작가로서 내가 낸 책이 많이 팔리는 경험을 한두 번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를 함께 얻으며 소위 ‘성공’에 가까워지는 그 순간, 내게는 두 선택지가 주어질 것이다. 금방 사라지는 것에 집착하며 거기에 그대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 그래도 정오 씨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출판계의 미래가 든든하네요. 열심히 한 번 해보세요.
C 대표님과 마지막 잔을 기울였다. 과거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C 대표님의 모습은 그 어떤 강연이나 책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이제 갓 출판계에 발을 디딘 새내기 편집자로서 이보다 훌륭한 수업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직은 사회 초년생이니 수업료는 다음에 내는 거로. 잘 먹었습니다,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