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는 책 만드는 존재다
“편집자는 어쨌든 책을 기획하는 게 핵심 역할이야. 문화기획 일과 완전히 다르다 할 수 없지만, 초점은 책에 맞춰야 해.”
이제 막 수습 기간이 마무리되고 정식 계약을 앞두고 있던 지난 2월, 회사에서 워크숍을 다녀왔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1년을 계획해보는 자리였다. 나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딱히 돌아볼 만한 일이 없었다. 반면 해보고 싶은 일은 무척 많았다. 출판사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나는 문화기획에 가까운 일을 해왔다. 청년들끼리 모여 재미난 행사 및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또한 모임을 넘어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했다. 비록 현실의 벽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지만, 의욕만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에도 이러한 욕망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문화기획단체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내 직함도 문화기획자가 아닌 ‘편집자’였지만, 내가 그동안 해오던 문화기획 일을 소박하게라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출판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문화 분야이기도 했다. 각종 행사 및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람들과 함께해볼 만한 재미난 걸 기획하는 일과 영 다르지도 않았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회사와 연계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총 3단계로 구상했습니다. 1단계는 SNS 서포터즈, 글쓰기 모임, 독서모임, 서평단 등을 만들어 지역 독자와의 접점을 많이 만드는 겁니다. 2단계는 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가벼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겁니다.
경남 통영의 한 카페. 회사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발표를 하다 말고 대표님 눈치를 살짝 보았다. 편집 일은 전혀 해보지 않은 데다 아직 정식 계약도 하지 않은 새파란 새내기 편집자가 이토록 당차게 말해도 되는 걸까.
- 마지막 3단계는 이들을 중심으로 공모사업과 같은 큰 단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겁니다. 그래서 ‘문화기획부’라는 부서를 새롭게 만들어, 출판과 함께 회사의 커다란 축으로 가져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발표가 마쳤다. 다행히도 대표님은 재미있다는 듯 살짝 웃으셨다. 몇 가지 피드백을 주시며 ‘그래, 어디 한번 해 봐라’라고 말씀하셨다. 허락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회사에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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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워크숍이 끝났다. 주말을 보낸 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했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우선 ‘문화기획’이란 폴더를 만들었다. 회사에 들어온 후 만들었던 ‘편집’이라는 폴더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교정·교열을 보거나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일보단 문화기획 일이 훨씬 더 재미있을 거 같았다. 워크숍 전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준비해왔던 기획들을 하나둘 실행에 옮겼다. 우선 SNS 서포터즈를 모집했다. 우리 출판사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활동이었다. 이어서 독서모임을 만들어 모집을 시작했다. 서포터즈 발대식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 글쓰기 모임 홍보를 시작했다. 대부분 일과시간 외에 하는 활동이었고 별다른 보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열심히 했다. 어쩌면 회사일보다 더 열심히.
한가했던 주말이 온갖 모임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번 주는 글쓰기 모임, 다음 주는 독서모임, 또 그다음 주는 오전에 독서모임을 했다가 오후에 서포터즈 중간 점검 모임. 대충 이런 식이었다. 처음 한두 달은 멋도 모르고 열정적으로 했다.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 일은 무척 재미있었다. 회사에도 제법 도움이 된다고 확신했다. 저자와의 만남 외에 별다른 행사나 모임이 없다가 갑자기 많은 활동이 생기니 눈에 띄게 활기가 생겼다. 나 역시 문화기획 일을 하다가 이곳 회사에 들어와서, 내가 이제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할 수 있어 좋았다.
- 문화기획 일은 너가 해오던 거라서 무척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질 거야. 반면 편집 일은 해본 적이 없으니 어렵고 힘들겠지. 하지만 너는 편집자고, 편집 일에 익숙해져야 해. 지금 당장 편하다고 익숙한 일만 해선 안 돼. 무엇보다 회사 일이 앞으로 점점 많아질 텐데, 자칫하다간 빨리 지칠 수도 있어.
대표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회사 비용이 크게 나가는 것도 아니니 회사 차원에서는 적어도 손해 볼 건 없다고 확신했다. 회사 업무에 지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근무 시간에도 더욱 열심히 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쉬지 않고 일했다. 즐거웠다. 워크숍을 다녀온 직후 뜨겁게 불타오른 열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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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며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회사 일이 능숙해짐에 따라 내가 맡게 되는 일이 하나둘 많아졌다.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좋은 일’이 구분되었다. 전자가 우선이었다. 내가 벌려놓은 모임들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결국 나의 열정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종 모임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관리가 소홀해지니 사람들의 활동도 점차 뜸해졌다. 그래서 더 소홀해지는, 그야말로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거기다 주말에 푹 쉬지 못하니 체력적으로 버거워졌다. 그렇게 나는 점점 지쳐갔다.
이런 내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대표님께서 상반기를 끝으로 모든 활동을 일단락 짓자고 제안하셨다. 야심 차게 준비했고, 이전에 해봤던 일이라며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그래서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이대로 마무리하긴 너무 아쉬웠다. 아니요,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도 충분히 많았고,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더 추한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SNS 서포터즈, 독서모임, 글쓰기모임이 상반기와 함께 모두 마무리되었다. 올해 초, 1단계부터 시작해 2단계, 3단계를 거치며 문화기획 부서를 만들어보겠다며 큰소리쳤던 나의 치기 어린 도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 넘쳐났던 패기와 열정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물론 당시 운영했던 모임이 계기가 되어 우리 회사와 끈끈한 인연이 맺어진 사람들도 제법 있다. 이들과 업무적으로 새롭게 연결되는 경우도 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회사 행사 때 이따금 만나기도 하고, SNS상으로 서로 소식을 받아보고 있다. 비록 활동은 끝이 났지만, 이들은 우리 회사의 든든한 우군으로 남은 셈이다. 다만 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뭔가 아쉬웠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름 문화기획자 출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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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도 벌써 절반이 지났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일이 몰리며 바빠질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정신없을 줄은 몰랐다. 현재 작업 중인 책이 여러 권 있고, 기관이나 재단과 함께 진행하는 크고 작은 사업들이 여러 개 있다. 회사에 출근해 회의하고, 미팅하고, 전화 몇 번 받고, 잡무를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끝난다. 할 일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주말이면 쉬기 급급하다. 불과 몇 달 전인데, 어떻게 그 많은 모임을 진행하고 관리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정신없이 일하다 말고, 우연히 ‘문화기획’이라는 폴더에 시선이 머물렀다. 한동안 들어가지 않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클릭해 들어가 봤다. 홍보 포스터, 공지 글 등 온갖 자료들이 그대로 있었다. 워크숍에서 돌아온 후 야심 차게 만들었고, 각종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동안 쉴 새 없이 바빴던 폴더였는데, 이렇게나 방치될 줄이야. 반면 지겹고 재미없게만 느껴졌던 ‘편집’이란 폴더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들락날락하고 있다. 책을 기획하고, 보도자료를 쓰고, 교정·교열을 보고, 마케팅하기도 충분히 바쁘다.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나는 편집자였고, 편집자의 주 업무는 편집 일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꼭 해야 하는 일 속에 둘러싸여 있다. 하나의 일을 쳐내면 두 개의 일이 온다. 이 틈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다만 출간 기획서를 쓰고, 교정·교열을 보고,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일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몇 시간씩 끙끙 앓으며 작성한 초안이 대표님께 넘어가기만 하면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그마한 상처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제는 책을 둘러싼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보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승부를 보고 싶은 곳도, 인정받고 싶은 분야도 이제 문화기획이 아닌 책이 되었다. 문화기획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다만 세상에 좋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남기고 싶었다. 그게 처음이자 끝이었다. 전부였다. 그러자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뚜렷이 보였다. 이 역시 나만의 과정이었을까.
그렇게 문화기획자 출신이었던 나는, 조금씩 편집자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