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가까워질수록 판타지의 세계는 점점 깨진다
“책 인세나 강사료, 원고료 등으로 먹고사는 건 그야말로 환상에 가까운 일이에요.”
꿈은 대체로 판타지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베일에 꽁꽁 감춰졌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높아지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 순간 판타지가 펼쳐진다. 꿈을 품는다. 선망의 대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판타지가 사라지는 과정 그 자체다. 꿈에 가까워질수록 환상의 세계가 깨지고 마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펼쳐진다.
꽤 오랜 기간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라 믿었고, 이왕이면 좀 더 큰 사랑을 받고 싶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싶었다.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밥벌이도 해결하고 유명해지는 것.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에게 있어 작가라는 존재는 그런 직업이었다.
편집자 직함을 단 이후 작가와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 한두 달은 감히 나 따위가 작가라는 엄청난 존재와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관계인데 팬심으로 만나니 참으로 큰 문제였다. 상태가 영 안 좋았다. 다행히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작가들과 만나는 자리가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A 작가님은 등단 8년 만에 첫 소설집을 냈다. 그 시기가 내 입사 시기와 딱 겹쳤다. 편집자가 어떤 직업인지 파악조차 못한 상태에서 덜컥 우리 출판사에서 책이 나온 셈이다. 내가 교정·교열을 보지도, 보도 자료를 쓰지도 않았다. 재밌어 보이는 책이 한 권 나왔구나 생각하며 철저히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재미있었다. 과연 작가님은 어떤 분일까 궁금했다.
회사에서 책이 나왔는데 마침 젊고 에너지 넘치는 새내기 편집자 한 명이 들어왔다. 책과 관련한 이런저런 자리가 만들어졌다. 책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편집자라는 이유만으로 행사나 모임에 참석하거나 진행을 맡았다. 혹시라도 책을 편집하면서 힘든 점이 없었냐는 질문은 받으면 뭐라 대답해야 하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자그마한 규모의 행사나 모임을 진행할 땐 별 준비 없이 갔지만, 가끔 큰 규모의 행사 진행을 맡을 때도 있었다.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여름, 부산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작가님의 소설집을 주제로 캠프를 진행했다. 2박 3일 캠프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저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약 50여 명의 대학생 앞에서 작가님을 모시고 사회를 진행해야 했다. 꽤 부담되었다. 이 전의 모임처럼 별 준비 없이 진행하긴 어려울 거 같아 A 작가님께 연락했다. 행사 며칠 전 사전 미팅을 하기로 했다.
회사 근처 북 카페에서 A 작가님을 만났다. 각종 모임과 행사에 참여하며 자주 보긴 했지만, 이렇게 카페에서 따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작가님과 단둘이 만난다는 것도, 일과 시간에 카페에 앉아 한적하게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모두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사회를 보며 행사를 진행할 건지, 작가님께 어떤 질문을 드릴 건지 등 몇 가지 얘기를 나눴다. 이후로는 사적인 욕망의 충족을 위해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아직 모든 것에 설레는 새내기 편집자가 오랫동안 글을 써 온 작가와 만나는 자리는 아무래도 조금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여야 하지만, 아직 조금은 스타와 팬의 관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상태 좋지 않은 편집자였다.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글쓰기 연습은 어떻게 하는지, 소설가의 일상은 어떤지, 실제 책이 나오고 주위 반응은 어떤지, 일상의 변화가 있는지 등 평소 ‘작가’라는 직업에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작가님께 답변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의외의 이야기도 제법 들었다. 그와 함께, 그저 멀리서 지켜보던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깨지는 느낌이었다.
- 작가님. 강연 때 이 얘기도 함께 나눠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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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을 벌기 위해 대학에서 시간 강사 일을 계속해야 하고, 가끔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마감 기한에 맞춰 열심히 써야 해요. 청탁이 분기별로 하나씩 들어오기도 힘든데, 설사 많이 들어와 꾸준히 쓴다고 해도 1년 수입으로 따지면 얼마 안 돼요. 가끔 이렇게 강연이나 모임 등에 초대 받아 강사료를 받지만,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금액이 그리 크지도 않아요. 즉 책 인세나 강사료, 원고료 등으로 먹고사는 건 그야말로 환상에 가까운 일이에요.
책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독서캠프인 만큼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대학생이 많이 참여했을 거라 확신했다. 책 내용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좋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 책과 글을 죽어라 좋아했던 대학생이었지만, 참 오랜 기간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 글쓰기로 돈을 벌고 유명해져서 참 멋있어 보이는 일을 많이 하는 존재. 하지만 환상은 막연한 기대만을 심어주며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편집자의 길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편집자라는 직함은 작가의 꿈을 꾸다가 결국 이루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한 결과였다. 작가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이지만, 작가는 아닌 존재. 회사에 들어와 작가가 그리 매력적이기만 한 직업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집에 가면 애를 돌봐야 해요. 가족들 밥 먹이고, 빨래하고, 청소해야 하죠.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이에요. 하지만 여러분과 만날 때마다 제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인지해요. 아, 정말 내가 책을 냈구나, 내 책을 재밌게 읽은 사람이 있구나, 깨달아요. 제가 소설가로 존재하는 시간이죠. 그래서 참 소중해요.
글을 쓰며 먹고 살기 참으로 힘든 세상.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현실. 특별할 게 없는 일상. 하지만 독자와 만나면서 자신이 소설가라는 걸, 작가라는 걸 인지한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작가님의 말대로, 작가는 어쩌면 늘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연히, 한 번씩 존재하는 직업이 아닐까.
A 작가님은 회사에 들어와 처음으로 가까워진 저자였다.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작가에 대한 환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번 강연에서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환상마저 무참하게 박살 나버렸다. 작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서 작가님께 제안한 건데, 오히려 내가 당해버린 셈이다.
꿈은 대체로 판타지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꿈에 가까워질수록 판타지의 세계는 점점 깨진다. 모든 환상이 사라지고 꿈의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을 때, 누군가에겐 꿈이 사라지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진짜 꿈이 시작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작가의 꿈이 조금 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