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 돼버린 걸까

대표님. 저... 일단은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by 박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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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베스트셀러를 참고해서, 후발주자가 되든지 아류가 되든지 어쨌든 돈이 될 만한 책. 그런 책을 기획하지 못하면 회사 잔고를 걱정해야 하는, 월급날이 다가올수록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다시금 해야 하니까.”


정식 계약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출판계에서 유명한 마케터 한 분이 부산에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말이었지만 조금의 망설임 없이 강연에 참석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베스트셀러들을 수십 권이나 만들어낸 마케터답게 현 출판계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부터 미래에 대한 전망과 트렌드 예측 등 알찬 이야기를 들려줬다.

질의응답 시간, 번쩍 손을 들었다.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제 갓 출판계에 발을 디딘 편집자로선 무척 헷갈리는 문제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을 기획할 것인가, 아니면 베스트셀러를 참고하며 독자가 원하는 책을 기획할 것인가. 더군다나 첫 책임편집으로 어떤 책을 기획할 건지 슬슬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 출판계에서 오랫동안 화두인 문제이기도 하죠. 다만 편집자라면 잘 팔리는 책을 좋은 책이라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케터의 입장에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다만 뭔가 못마땅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다 보면 운이 좋아 대중적인 반응을 얻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반면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쫓아다닌다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몇 번은 얻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땐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닐 거라 확신했다. 듣고 싶은 대답이 따로 있었던 걸까. 사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기획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걸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도 좋다. 내가 좋은 마음을 담아 만든다면 독자들에게도 그 진심이 전달되어 시장 반응이 좋을 거라 믿었다.


*


회사는 연초에 한 해 계획을 세운다. 돈이 될 만한 프로젝트 및 사업을 여기저기서 따오며 일 년을 이끌어나갈 준비를 한다. 그럼에도 중순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시작된다. 특히 직원이 몇 안 되는 자그마한 회사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도드라진다. 간신히 버티며 연말이 되면 일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일의 질은 나쁜 반면 확실히 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이 몇 개씩 쌓이면 정신없는 나날이 펼쳐진다. 돈 번다고 정신이 없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보릿고개 때 손해 본 걸 메운다. 그 돈으로 다시금 한 해를 계획한다. 건강한 순환고리라 볼 수 없지만, 어지간한 규모의 기업이 아니면 대부분 회사가 이와 비슷한 사정이지 않을까 싶다.


출판계 사정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곤 했다. 수도권과 파주의 유명한 출판사에서도 매출이 크게 떨어졌다느니, 구조조정을 했다느니 등 안 좋은 소식이 들리곤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지역 출판사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갓 입사해 열정과 패기가 넘치던 지역 출판사의 한 편집자는 좋은 마음을 담아 여러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책을 중심으로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겠다며 여러 모임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하고, 책 홍보를 위해 온갖 콘텐츠를 새롭게 기획해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과 별개로 출판사 사정은 점점 안 좋아지기만 했다. 회사에 돈이 없었다. 물품을 구입하거나 점심을 먹는데, 회사 카드로 결제가 안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회사 월급날이 다가오면 설렘보다 불안감이 앞섰다. 회사 사정이 이렇게 안 좋은데, 혹시나 월급이 밀리는 건 아닐까. 대표님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듣곤 했다. 말단 사원이 회사 돈 걱정을 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회사가 돈이 없다는데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말단 사원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배가 불러야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나오고 여유 있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데, 배가 고프니 오로지 돈 걱정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소신을 지키려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을 만들고자 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무명 저자의 글을 첫 책임편집 책으로 선택했다. 새로운 저자를 발굴한다는 차원에서는 참 가치 있는 일이었지만, 판매량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다행히 초기 투자비용은 회수할 수 있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좋은 마음을 담아 선한 의도로 책을 기획한 것과 별개로 시장 반응이 그랬다. 회사 사정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내 소신을 지키려 했다. 두 번째 책 역시 무명 저자였다. 수익을 얻는다기보다 투자 개념에 가까웠다. 나름 기대를 했음에도 언론에서 거의 다뤄주지 않는 모습에 절로 힘이 빠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했지만 경제적인 성취와는 늘 거리가 멀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답이 없다. 의미와 가치도 좋고 진심을 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수익을 내지 못하면 다시금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그저 좋은 추억 하나만 남을 뿐이다. 의미고 뭐고 일단 유명해져야 한다. 많이 팔아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나 개인의 자아실현이 아닌 회사 수익 창출이 우선이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간신히 내게 딱 맞는 직장을 찾았다. 그런 회사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남의 일이라는 듯 태평하게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오래 가고 싶었다.


*


- 너가 제안한 아이템도 나쁘진 않은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아닐까. 한 개인의 솔직담백한 이야기, 말랑말랑한 제목에 적당한 일러스트가 들어간 에세이. 베스트셀러 중에 이런 책이 많고 또 그만큼 많이 팔린다는 거긴 하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충분히 하고 있는 것들을 굳이 우리가 할 필요가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좋은 책과 베스트셀러 사이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과 시장에서 반응이 있는 책의 간극에서 헤매지 않았다. 어차피 독서 취향이 대중적이지 못하니 내 입맛에 맞는 책은 기획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잘 팔리는 책을 기획하기로 했다. 돈 되는 책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지금의 베스트셀러를 참고해서, 후발주자가 되든지 아류가 되든지 어쨌든 돈이 될 만한 책. 그런 책을 기획하지 못하면 회사 잔고를 걱정해야 하는, 월급날이 다가올수록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다시금 해야 하니까.


- 책 관련 이벤트도 진행하고, 여기저기 연락하고 책도 뿌리고, 홍보 콘텐츠도 열심히 만들고. 다 도움 되는 일이긴 한데, 요즘 너무 그쪽에 빠져있는 거 같은데. 우리 회사에 마케터가 없어서 너가 그 영역까지 챙긴다고 고생하는 건 알고 있긴 한데, 마케터가 아닌 편집자라면, 책을 어떻게 팔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떤 책을 기획할지 초점을 맞추는 게 좋지 않을까.


당장 새로운 책을 기획할 수 없기에, 최근에 나온 책을 홍보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증정 이벤트, 서평 이벤트, 독서모임 지원 이벤트. 거기다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워가 많은 사람에게 연락해 책을 보내주곤 했다. 그냥 보내면 성의 없이 보일까 봐 책 홍보를 잘 부탁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종이까지 일일이 넣어 직접 우체국에 가서 붙이곤 했다. 편집자 서평도 쓰고, 인터뷰 콘텐츠도 만들었다. 이렇게 한다고 많이 팔린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책이 정말 안 팔릴 거 같았다. 책 팔아서 먹고사는 회사인데, 책을 최대한 많이 팔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 회사 잔고를 걱정해야 한다.


- 대표님. 저... 일단은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대표님의 피드백을 받곤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예전 같았으면 곧이곧대로 들으며 스스로 반성하고 대표님이 시킨 대로 했을 테지만, 이제는 내 주관이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머리가 큰 걸까. 대표님, 이번에 나온 책도 할 수 있는 마케팅은 모조리 해보려고요. 제가 기획한 책이 많이 팔려서 유명해지는 경험을 한 번은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믿으니까요. 편집자로서 정체성, 방향성은 그 다음에 찾으려고요. 일단 대박 하나 터뜨리고 난 다음, 앞으로도 많이 팔릴 만한 책 위주로 기획할 건지, 아니면 부와 명성만으로 충족이 안 되는 걸 알고 다시금 제가 생각하는 좋은 책을 기획할 건지 말이죠.


- 뭐, 회사 입장에서 고맙긴 하지만... 이제 정오 앞에서 대출 받았다는 얘기 하면 안 되겠네.


대표님의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회사 걱정을 이토록 하는 직장인이 어디 있는가. 이러다 회사 대표가 직원 눈치를 보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펼쳐지는 건 아닐까 싶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일 수 없다고 확신했던,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만들면 잘 팔릴 거라 믿었던, 돈이 될 만한 것만 쫓아다니는 행위는 속물적이라 여겼던, 불과 1년 전의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졌다. 회사는 원래 돈이 목적인 집단이다. 직장인도 회사가 돈을 벌기 위한 행위를 한다.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특별한 이유는 돈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거나 밥벌이 행위로부터 좋은 의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박정오는 돈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 돼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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