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좋은 편집자란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내가 세상 밖으로 꼭 내놓고 싶은 책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만든 책이 세상 그 어떤 책보다 값어치가 있다고 굳게 믿는, 그토록 소중한 책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런 편집자가 있을 뿐이다.”
책 읽는 걸 예전부터 좋아했지만, 편식이 무척 심했다. 내 취향이 확고했고 좋은 책의 기준도 뚜렷했다. 이러한 증상은 편집자 직함을 달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소위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책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곤 했다. 작가는 왜 이런 책을 썼으며, 출판사는 왜 이런 책을 기획한 걸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책을 기획한다면 정말 누구나 인정할 만한, 내용도 좋고 사회적인 의미도 있고 메시지도 담긴, 그런 멋진 책을 만들어야지, 홀로 다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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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휴가를 다녀오니 내 자리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하얀 바탕에 귀여운 느낌의 그림 하나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책등, 뒷표지, 날개, 목차, 머리글 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판권지를 확인했다. '편집' 부분에 내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그동안 나온 책들도 마찬가지로 편집 부분에 내 이름이 있긴 했다. 하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번 책은 내가 처음으로 책임편집을 맡아 만든 단행본이었다. 나로서는 편집자로 데뷔하는 책이자, 편집자 직함을 달고 있는 한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작품이기도 했다. 그만큼 내겐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와 어떻게 만났는지, 책 작업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 책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꼭 세상 밖으로 내놓고 싶었던,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책보다 값어치가 있다고 굳게 믿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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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책 만드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회사에 들어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귀하디귀한 편집자 직함을 이토록 준비성 없이 달아도 되는 걸까, 스스로 반성해야할 정도였다. 책을 만들려면 우선 저자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방법도 모르겠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막막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봐야 하나, 아니면 블로그나 브런치를 유심히 살펴볼까. 내 주위에 저자가 될 만한 사람은 없을까, SNS 계정 친구 목록을 훑어보기도 했다. 아, 그 전에 어떤 책을 만들어야 하는지가 우선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가.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철학이나 역사인데, 내가 처음부터 그런 책을 기획하긴 어려울 거 같았다. 그럼 에세이? 그런데 에세이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은가.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아, 어떡하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새내기 편집자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혹은 아는 사람을 통해 저자를 찾는 건 무척 어려울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지난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았다. 책과 글쓰기와 관련된 다양한 모임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스스로 독서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었다. 그럼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볼까? 모임을 운영하면서 함께 글을 쓰다 보면 작가도 발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른 편집자들은 어떻게 작가를 찾는지 몰라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고민 끝에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다만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출판까지 연결될 만한 콘텐츠를 찾았다 해도 대표님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냥 우리끼리의 모임으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3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모험이라면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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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쌀쌀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봄, 당시 사무실이 있던 오피스텔은 쓰레기장과 야외 흡연장이 붙어 있었다. 나는 재활용품을 버리러, 대표님은 담배를 피러 내려온 상황이었다. 곧장 올라갈까 하다가 지금이다 싶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대표님, 제가 글쓰기 모임을 하다가...
원래 출간 제안을 위해선 기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작성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편집 회의 때 정식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적어도 이렇게 사무실도 아닌 공간, 그것도 쓰레기장 혹은 흡연장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출간을 제안하는 건 영 아닌 듯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출간 제안을 그 따위로 했던 걸까. 아마 내 판단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그나마 포장 하자면, 이제 막 처음 편집을 시작하려 하는 새내기 편집자의 미숙함 혹은 패기였다. 더 황당한 건 출간 작업을 진행해도 괜찮겠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곳에서 갑작스레 제안을 한 것도 웃겼지만, 허락을 받았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렇게 내가 첫 책임 편집을 맡게 될 책은 수영의 한 오피스텔 쓰레기장 앞에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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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작업을 진행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후 눈에 띄게 바빠졌다. 그저 글쓰기 모임에서 매주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감탄하고 재밌게 잘 읽었다는 댓글을 남기는 것과, 이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는 작업은 엄연히 달랐다. 이제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편집자의 입장에서 좀 더 냉정하게 글을 바라봐야 했다. 더군다나 원고가 아직 반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넉넉하게 잡으면 4~5개월 후에야 책이 나오는 일정이었다. 원고 관리가 필요했고 출간 기획안 작성도 무척 중요했다. 기획안을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새내기 편집자에겐 어려운 과제였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애초에 계획한 날짜에 목표 분량을 채웠다. 목차를 다시금 구성했다. 챕터를 나누고 글의 순서를 짰다. 이 과정에서 몇몇 글이 빠지기도 했고 추가되기도 했다. 약 4~5개월의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내가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봐왔던 경우는 대부분 이 시점에서 출간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훨씬 오래 걸리고 에너지 소모가 많은 과정이었다. 한편으론 쉽게 경험하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처음으로 책임 편집을 맡은 책이라 순간순간이 모두 특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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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홍보 및 초기 출간 비용을 위해 소셜 펀딩을 진행했다. 다행히 목표 금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책 유통을 시작했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책 정보가 떴다. 알라딘, yes24, 교보문고 등 각종 인터넷 서점에 버젓이 ‘신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등록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도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저 한글파일 상으로만 보던 글이 실제 책이 되어 나온 것도, 글쓰기 모임 멤버뿐만 아니라 전국에 수많은 독자가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편집자는 책 만드는 일을 하라고 월급 받는 존재였고, 나는 월급을 받은 만큼 일해서 책을 만드는 존재였다. 나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상품을 보고 뭉클해 하고 감격하고 설레 하다니,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첫 책임편집을 맡은 책인 만큼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그 어떤 책보다 더 열심히 홍보를 하려 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작가님께 믿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연말이 가까워지며 회사가 눈에 띄게 바빠졌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자연스레 홍보 마케팅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출고 작업을 하며, 내가 책임 편집을 맡은 책이 몇 권 들어왔는지 매일 주문량을 확인하고, 재고를 체크했다. 내가 만든 책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고 또 고마웠다. 홍보에 쏟아 붓는 시간 중 대부분을 이 책에 투자했다. 너가 만든 책만 너무 그렇게 편애하지 말라는 대표님의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티가 나게 편애했다. 회사 SNS를 보면 온통 내가 책임편집을 맡은 책의 홍보 콘텐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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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고 약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두 번째 책임편집 책의 저자와 미팅을 가졌다. 이후 그 책 작업으로 정신이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발굴한 저자라고, 내가 편집자로 데뷔하는 작품이라고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그 어떤 책보다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부었는데, 어느새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쉽게 변할 줄이야. 아쉽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또 다음 책을 기획하고 만들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저자 역시 이번 첫 책이 출발점이지 결코 도착점은 아니었다. 책 기획부터 시작해 출간까지 함께 걷긴 했지만, 이후로는 각자 걸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편집자와 저자가 향하는 곳이 같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책임 편집을 맡은 두 권의 책은 묘하게 겹쳤다. 첫 번째 책의 저자가 짧게나마 TV 방송에 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 번째 책 저자와의 미팅을 준비했다. 첫 번째 책 저자와의 만남을 준비하며 두 번째 책 소셜 펀딩을 준비했다. 첫 번째 책이 아르코 문학나눔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쯤, 두 번째 책 텀블벅이 목표량을 달성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두 번째 책이 출간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 나는 다시금 새로운 출간 아이템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하나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면 항상 또 다른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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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일하다 말고 간만에 첫 책임편집을 맡은 책을 집어 들었다.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좋은 편집자란 무엇일까. 책을 처음 기획할 때 좀처럼 끊이지 않았던 고민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데, 좋은 편집자가 되고 싶은데,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 답답했다.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 진행하니 그 해답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좋은 책, 좋은 편집자 따윈 없었다. 다만 누가 뭐래도 내가 세상 밖으로 꼭 내놓고 싶은 책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만든 책이 세상 그 어떤 책보다 값어치가 있다고 굳게 믿는, 그토록 소중한 책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런 편집자가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