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감히 편집자에게 마감 압박을 하다니

매니저님, 사람 잘못 건드리신 거 같네요. 제목 그대로, 전쟁 시작입니다

by 박정오

알람이 울린다. 아침 8시다. 오늘 토요일인데 왜 알람을 맞춰놓고 잔걸까. 술 냄새가 입 안 가득 배어있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회사 이삿날이었다. 9시 30분까지 보기로 했던 거 같은데. 알람을 10분 후로 맞춘다. 망설임 없이 잠을 청한다. 몇 분 지각한다고 큰일 나진 않겠지. 될 대로 돼라. 어차피 주말인데.


샤워를 마치고 널브러진 옷을 대충 주워 입는다.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몸을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긴다. 이번 달은 정말인지 지옥 같은 일정이다. 연말이면 회사 일이 많아진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10월, 11월, 12월 석 달 동안 작업해야 하는 책이 10권을 훌쩍 넘겼다. 한 달에 보통 두 권 정도 작업하는 편이기에 이것만 해도 무척 빠듯했다. 거기다 각종 기관, 재단 등과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있었고, 큼지막한 행사도 몇 개 잡혀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올 중순까지 한가했으니, 연말에 바쁜 건 쌤쌤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도저히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회사 사무실을 옮긴다니. 말도 안 되었다. 주간 회의 때 몇 번이고 반대했다. 일단 바쁜 게 다 끝나고 나서 옮기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어째서 갑자기 이사가 잡혔는가. 그것도 황금 같은 주말에!


부랴부랴 사무실 앞에 도착한다. 9시 40분. 오늘도 어김없이 늦었구나. 나 빼고 전부 도착해 있었다. 회사 사무실 식구부터 시작해, 앞으로 공간을 함께 사용할 사람들까지. 다들 짐을 옮긴다고 정신없어 보였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늦어서 죄송하다고 연신 허리를 굽힌다. 회사 선배님이 어제 술 많이 마셨냐고 묻는다. 조금... 마셨습니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근처만 가도 술 냄새가 진동한다며 나와 거리를 두려 한다. 아침에 양치를 두 번이나 하고 왔는데도 술 냄새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괜히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 한숨에서 술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아, 적당히 좀 마실걸. 그건 그렇고 사무실에 있는 큰 가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사할 때 보통 큰 짐부터 옮긴다. 고로 늦게 도착한 덕분에 무겁고 힘든 짐을 옮길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로써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다. 오, 시작이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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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뭐 먹고 싶냐는 말에 1초의 망설임 없이 해장국이라 대답했다. 지금 당장 해장국을 먹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으랴. 다행히 점심은 새 보금자리 근처에 있는 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해장국 하나에 무려 9,000원이나 했다. 진한 육수 위에 갖가지 재료가 가득했고, 그 위로 고기와 버섯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허겁지겁 해장을 했다. 아, 이제 좀 살 거 같구나.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일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 얼른 발 닦고 푹 자고 싶다.


식사가 아닌 사료처럼 해장국을 흡입했던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 보금자리는 우리 회사 말고도 몇몇 문화예술 단체들이 입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등 따시고 배가 부른 이후에야 이 사실을 인지했고, 지금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안면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곧장 취업하지 않고 ‘문화기획’ 언저리에 맴돌면서 이래저래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장 어색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알게 된 지는 2~3년 정도 된 거 같은데, 나와 좀처럼 접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인터뷰 활동을 오래 했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글쟁이’라는 사실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여기저기 언론사에 칼럼도 연재하고, 단행본에 들어갈 인터뷰 글도 직접 쓰고, 그 외 여기저기서 글과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 그리고 우리 나이대에 좀처럼 찾기 힘든 ‘글쟁이’라는 사실에, 예전부터 정체가 궁금했던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활동을 해오다가, 밥벌이 장소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이번에 함께 입주하는 새 공간의 매니저로 들어온다고 한다. 음, 공간 매니저라. 그럼 앞으로 출근하면 매일 보게 되는 걸까. 마침 글 쓰는 거 좋아하고, 문화기획 경험도 적당히 있는 또래가 주위에 한두 명쯤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함께 해볼 만한 재미난 일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어느새 공간을 옮긴 지 6개월이 훌쩍 지났다. 연말을 맞아 둘이서 조촐한 행사 하나를 만들어 무대에서 공연 아닌 공연도 해보고, 어려운 책을 읽고 각자 글을 연재하고 서로 피드백해주는 스터디도 진행해보았다. 문제는 두 개 모두 일회성으로 그쳤다는 것이다. 다시금 무언가 재미난 걸 해보려고 공모 사업에 도전했는데, 단번에 떨어졌다. 재미난 일이 많이 펼쳐질 거라 확신했는데, 제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글 쓰는 사람들이라 활동적인 건 영 어울리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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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공간 매니저님이 글 한 편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글이냐 물으니, 공간 매니저 업무에 관한 글이라 했다. 내가 예전부터 좋은 소재라며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이제야 부랴부랴 쓰고 있다니. 생각보다 손님도 잘 안 오고, 통장 잔고는 줄어들고, 뭔가 새로운 해법이 필요한 거 같아 일단 무작정 시작해본다고 했다. 그럼 같이 한 번 해보죠. 한 공간에 있는 두 직함. 공간 매니저와 출판 편집자, 이 둘의 이야기. 각자 이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같은 사건을 각자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브런치에서 꽤 먹히겠는데요? 반응 좋으면 출판도 해보죠. 물론 저희 출판사 말고 다른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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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분, 좀 치사하다. 자기가 먼저 다 써놓고 대뜸 SNS에 공동 프로젝트라며 올려버린다. 3일 안에 너도 얼른 올리라고 한다. 올해 처음으로 휴가를 쓴 오늘, 푹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카페로 간신히 기어 나와 글 한 편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도 카톡으로 계속 압박한다. 얼마나 썼냐고, 언제 올릴 거냐고. 감히 편집자에게 마감 압박을 하다니. 매니저님, 사람 잘못 건드리신 거 같네요. 매거진 제목 그대로, 전쟁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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