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친구, 회사 - 세 개의 세계 속에서

이토록 많은 역할 속에서 때론 헷갈리기도 한다

by 박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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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많은 역할 속에서 때론 헷갈리기도 한다. 가족끼리 있을 때, 친구들끼리 있을 때,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 나는 각각 다른 사람이 된다. 나는 어디에 있을 때 가장 나다울 수 있을까.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목요일 저녁, 퇴근 후 곧장 창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금요일은 가족끼리 여름휴가였고, 토요일은 대학 친구들 모임, 또 일요일은 회사 관련 행사로 빼곡히 차 있었다. 한동안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다 간만에 바쁜 일정을 맞이했다. 세 개의 일정 중 하나라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꽤 신경 써야만 했다.


늦은 저녁, 본가에 도착했다. 간만에 다섯 식구가 모였다. 30년 직장 생활을 뒤로한 채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시는 아버지, 일이면 일, 운동이면 운동,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어머니, 울산에서 직장 생활 4년 차로 접어든 형, 이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늦둥이 띠동갑 동생까지.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대식구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통영으로 향했다. 루지를 타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여기저기 유명한 관광지에 들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근처 식당에서 배 터지도록 저녁을 먹었다. 간만에 아버지와 소주도 마셨다. 이후 노래방에 가 신나게 놀았다.


가족끼리 모이면 온갖 얘기들이 오간다. 엄마아빠 친구들은 다들 며느리 사위 데리고 오고 손자 손녀도 보는데 너희는 대체 뭐하냐, 동생 고등학교 어디 갈지 같이 좀 알아봐라, 교육 과정 바뀐다는데 오빠들이 좀 챙겨줘라, 아버지 정년 얼마 안 남았는데 얼른 성공해라, 돈 많이 벌어라, 살 좀 빼라, 제발 이렇게 가족끼리 다니지 말고 여자친구 만들어서 각자 좀 놀러 다녀라, 잘 좀 챙겨 먹어라 등. 걱정과 잔소리로 가득하다. 차 안에서든, 식당에서든, 집에서든, 늘 티격대격한다. 대답은 늘 같다. 알아서 할게요. 결론도 한결같다. 그래도 우리 가족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이 말을 들을 때면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예전에는 취업 문제로 갈등이 많았었는데. 이 속에서 나는 그 무엇도 아닌, 그저 한 집안의 둘째 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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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밀양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먼저 도착해 장을 보고 있었다. 대학 시절 항상 붙어 다닌 이른바 '팸'이었다. 대학에 다닐 땐 일 년에 한두 번씩 1박 2일로 어디 놀러 가곤 했는데, 다들 직장인이 되니 점점 모이기 힘들어졌다. 다섯 명에서 이렇게 놀러 온 것도 2년 만이었다. 아무튼 나이에 맞지 않게 물총 다섯 개를 사 들고 밀양 얼음골 계곡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조금은, 아니 어쩌면 엄청 바보처럼 말이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술과 안주를 끊임없이 먹었다. 20살 때 처음 만난 친구들이었지만,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대 후반 남자 다섯 명에서 고상하고 생산적인 얘기가 오갈 리 없다. 술이 더 들어가면 아니나 다를까, 옛날이야기로 빠진다. 그것도 죄다 전 여친 혹은 썸 탔던 이야기다.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항상 붙어 다녔기에 서로 비밀이 전혀 없다. 꽤나 위험한 사이인 셈이다. 결론은 항상 서로에 대한 폭로전과 맹목적인 비난으로 이어진다. 너가 진짜 쓰레기다, 내가 제일 착하다, 너는 지옥도 못 간다, 너 결혼식 날 다 폭로할 거다 등. 다들 또라이에, 병신에, 쓰레기들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 속에서 나는 그 무엇도 아닌, 그저 20대 후반의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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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부랴부랴 부산으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실었다. 오후에 우리 회사 저자의 북토크 행사가 있었다. 회사에서 기획한 행사도 아니었고 참석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주최 측과 저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편집자로서 얼굴을 비추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집에 들를 틈도 없이 곧장 행사장으로 향한 것이다. 빠듯한 일정에 무척 피곤했고 정신도 없었지만, 강연 내용이 재미있어 이내 집중해서 들었다. 행사가 끝나고 연사님 부부와 회사 대표님까지 네 명에서 근처 카페로 가 얘기를 나눴다. 이후 대표님과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 헤어졌다.


회사 관련 사람들을 만나면 아무래도 업무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주말에 편하게 만나는 자리마저 회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나는 다시금 편집자가 된다. 출판문화를 걱정하고, 지역 출판사 편집자로서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지,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며 지식인 흉내를 낸다. 이 속에서 나는 그저,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20대 후반의 사회 초년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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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동안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부산에서 창원으로, 창원에서 통영으로, 밀양으로, 다시 부산으로. 끊임없이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거나, 이동하거나, 놀거나, 무언가를 먹었다. 모두 친숙하고 내게 참 소중한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정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삼일 동안 만난 세 개의 집단은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회사까지. 지금의 박정오를 이루는 세 개의 커다란 축이었다. 훗날 누군가와 만나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 좀처럼 바뀌지 않을 축이기도 했다.


이토록 많은 역할 속에서 때론 헷갈린다. 가족끼리 있을 때, 친구들끼리 있을 때,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 나는 각각 다른 사람이 된다. 나는 어디에 있을 때 가장 나다울 수 있을까.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 아들로서, 친구로서, 직장인으로서 각각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세 개의 세계 속에서 때론 섭섭한 일도 생기고, 다투기도 하고, 삐걱거리기도 하겠지만, 내 주위 사람들의 소중함을 잊지 말 것.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이며, 함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 것. 너무 한쪽에만 빠져 다른 쪽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 세 개의 세계 속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것. 쉽진 않겠지만, 이러한 노력을 결코 멈추지 말 것. 휴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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