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세계가 처절하게 깨지는 그 순간,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는 걸까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주식에 관심 가지게 되더라고.
조금씩 투자해서 잘 굴리면 돈을 제법 벌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
회사 업무로 서울에 출장을 왔다. 겨우 2~3시간의 미팅만 끝내고 곧장 내려가긴 아쉬워, 하루 연차를 내고 주말까지 2박 3일 동안 머물기로 했다. 낮에는 서울에 있는 서점, 북카페 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을 돌아다니기로 했고, 저녁에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 간만에 술 한잔 하면서 회포를 풀기로 했다.
A는 대외활동을 하며 만난 동갑내기 친구였다. 꽤 독특한 캐릭터였다. 다양한 대외활동 경험, 공모전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글을 무척 잘 썼고, 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정치, 사회 문제에도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디자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말도 유창하게 잘했고, 유머와 진지함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술을 무척 좋아했다. 이 부분이 나와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둘이 술을 마실 때면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술자리 내내 정치 얘기, 사회 얘기를 열띠게 하곤 했다.
대학 졸업 후, A는 취업 준비 과정을 거치며 서울에 있는 한 공기업에 들어갔다. 합격 발표 후 A는 부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술 먹고 싶은 날이면 연락을 하곤 했던 친구가 갑자기 떠나버리니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는 A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술친구를 하나둘 만들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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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며칠 있기로 결정하고 누구한테 연락해볼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A가 생각났다. 그토록 친하게 지냈는데 한동안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서로에 대한 무심함은 피차일반이었고, 남자 사이에선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기회 될 때 한 번씩 보는 거지, 뭐. A에게 연락을 했다. 약속을 잡고 만났다. 거의 1년 만인가. 그토록 자주 만나던 사이였는데 사는 지역이 달라지고 둘 다 직장인이 되니 이렇게 한 번씩 얼굴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걸까. 아무튼 반가웠다.
근처 감자탕집에 들어가 간만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야, 어떻게 지냈냐. 직장 생활은 어떠냐. 서울의 그 쟁쟁한 경쟁자들을 뚫고 다들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들어온 것도, 자신이 예전부터 관심 가지고 좋아하던 일을 하는 것도 모두 대단하게 느껴졌다. 60살 넘어서까지 정년이 보장되어 있으니 별다른 걱정도 없을 테다. 야근도 거의 없겠지? 거기다 서울에는 문화인프라도 잘 되어 있고, 놀고 즐길만한 거리도 많으니 삶의 만족도가 무척 높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예상과는 달리 A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 나도 처음엔 신나서 막 열정적으로 했거든. 회사에서 발표 PPT 만들어오라고 했는데, 막 일러스트까지 활용하면서 열심히 만들었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퇴근하고 남아서 일하기도 했고. 근데 일을 하면 할수록,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시키는 대로, 시키는 만큼만 하면 별문제 없는데 말야. 그래서 이젠 딱 그 정도만 하게 되더라.
내가 아는 A는 열정이 넘치고 무언가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를 하더라도 완벽하게 하는 편이었다. 회사에 가더라도 이런 기질이 바뀌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A가 들어간 회사는 커다란 규모의 공기업이었고, 예상보다 훨씬 경직된 조직이었다. 시키는 것만 적당히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열정적으로 도드라지게 무언가를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정년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잘릴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남에게 피해 안 줄 만큼 적당히만 하는 게 최고의 미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회사 분위기는 A를 점점 잠식해 들어갔다.
- 먹고살 만큼은 벌고 있지만, 월급만 차곡차곡 모아서 집을 산다거나 하는 건 꿈도 못 꿔. 특히 이곳 서울에선 더 그렇고. 그러니 나도 남들처럼 주식에 관심 가지게 되더라고. 조금씩 투자해서 잘 굴리면 돈을 제법 벌 수 있으니까. 실은 나도 얼마 전부터 주식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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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이라 해서 회사 생활이 마냥 편하고 쉬운 건 아니다. 직장 생활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도, 누군가와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전체적인 방향이나 그림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쫄딱 망할 일은 없겠지만 별다른 반등의 여지도 없는 셈이었다. 그나마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돈을 조금씩 불리는 게 현명한 판단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A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A는 주식에 관심을 가지기보단 금융자본의 과도한 투기로 인한 부작용을 지적하는 모습이 더 어울렸다. 현재에 안주하기보단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고,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기보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더 어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내가 기대했던 A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나보다 더 유능하고 깨어있는 A는 그런 모습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며 현실에 적응하는 건 당연한 과정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취업 따윈 죽어도 하지 않겠다며 떼를 쓰던, 취업 준비를 하는 사람을 싸잡아 ‘보편적 매춘행위’라 비판했던, 취업을 하는 그 순간 꿈을 져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거라 굳게 믿었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다. 그랬던 내가 직장생활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저금도 하고 미래도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다. 돈이 안 되는 일에는 관심이 점점 사라졌다. 일이 주어지면 일단 돈이 되는지부터 확인하곤 했다. 나는 결국 실패했지만, 그래도 너만은 조금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그래. 너는 달랐어야만 했다. A와 술잔을 기울였다.
아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너는 남들이 그토록 꿈꾸는 기업에 들어와 멋지게 일을 하고 있었다. 너는 부산에서 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서울에 있는 회사에 당당히 입사해 잘 다니고 있었다.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너가 주식과 부동산에 관심 가지는 건 잘못된 게 아니었다. 불법도 아니었다. 너가 안정된 미래를 꿈꾸는 모습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내가 문제였다. 나 역시 먹고사는 문제로 급급하면서 왜 나의 이상을 너에게 투영하고 있는가. 나도 냉혹한 현실 앞에 무기력하긴 매한가지 아닌가. 내가 만약 너의 입장이었다면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나라고 뭐 크게 다르겠는가? 이러쿵저러쿵 팔짱을 낀 채 너의 모습을 평가내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럴 자격도 없었다. 나 따위가 뭐라고.
그럼에도 씁쓸한 감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뭐 하나 내세울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대학 시절, 허구한 날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나눴던 얘기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회 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처럼 열띠게 토론하던 그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토록 패기 넘치던 우리들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술잔을 기울였다. 목 넘김이 유난히도 거칠었다. 이 씁쓸하고 서글픈, 안타깝고 또 애잔한, 참 복잡하고 이상한 감정도 술과 함께 떠나보냈으면 싶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올라올수록 이 미묘한 감정은 더욱 선명해졌다. 우리가 품었던 이상은 이렇게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는 과거 그토록 비판해오던 것과 너무도 쉽게 타협하고 말았다. 다만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토록 발버둥 치고 있었다. 당연한 걸까. 이렇게 과거의 세계가 처절하게 깨지는 그 순간,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는 걸까.
“뚜렷한 신념도 진지한 노력도 없으면서 무슨 구도자인 체하고,
근거 없는 나르시시즘에 취해 열심히 천재의 흉내를 내는 속물이며,
그런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곧잘 공격적으로 나오는 비겁자
- 이것이 당신들의 진정한 모습이오.” - 『젊은 날의 초상』(이문열)
세상을 바꾸겠다며 큰소리치던 젊은이 두 명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 급급한 직장인 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각자 신세 한탄이나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