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 파고 있는데... 진짜 안 되면 어떡하냐...
노량진 지하철역 근처에서 5535번 버스를 탔다. 와, 서울은 버스가 네 자리까지 있구나. 마치 도시에 처음 온 시골사람처럼 연신 감탄했다. 나도 제2의 수도라는 부산에 사는데! 약 20분 정도 이동하니 B가 알려준 정류장 이름이 나왔다. 전화를 걸었다. 설마 안 받는 건 아니겠지? 전화가 연결되었다. 마, 지금 내린다, 빨리 나온나.
약 일 년 만이었다. 살이 조금 빠진 거 같긴 한데,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빠진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지난 일 년간 회사 일을 하며 구르는 동안, B 역시 죽어라 공부하며 보냈을 테다. 이야, 오랜만이네. 왜 왔노? 미친놈아, 니 만날라고 5시간 기다렸다. 키득키득하며 B의 집으로 함께 향했다.
B의 집은 전형적인 서울의 원룸이었다. 자그마한 크기의 집에 주방과 욕실까지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싱크대엔 국그릇과 숟가락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주방은 있었지만 요리하는 공간으로 보이진 않았다. 대충 인스턴트 음식이나 시리얼로 끼니를 때우지 않을까. 마, 먹을 거 없나. 냉장고를 열었는데 역시나, 별다른 게 없다. 맥주는 있다는 B의 말대로 정말 피처 맥주가 덩그러니 있었다. 휑한 냉장고와 사뭇 대조되었다. 안주 뭐 먹을래? 행님이 쏜다. 요 근처에 옛날 통닭 파는 데 있다. 사 올까? 어, 좀 사 온나. 난 좀 씻고 있을게. 니 기다린다고 밖에 한참 있어서 땀 많이 흘렸다. B에게 카드를 건넸다.
- 빨리 안 오냐. 장교 출신이라고 발맞춰서 걷고 있냐.
- 와 아직도 노잼이네. 가고 있다, 상이나 차리고 있어라.
B를 기다리며 놀라울 만큼 쓸데없는 카톡을 주고받았다. B는 대학 시절 대외활동을 하며 만난 동갑내기 친구였다. ROTC를 나와 몇 년 전 장교로 제대한 B는 현재 서울에서 홀로 지내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느 친구 사이가 그렇듯 가까이 살며 자주 만나거나,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없으면 서로 연락이 없는 관계였다. 그러다 작년부터 B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기자 시험을 준비한다며 글쓰기 관련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곤 했다. 왠지 오늘도 글쓰기 얘기를 할 것만 같다. 현관문이 열리며 B가 들어온다. 와, 내 카드 들고 튄 줄 알았네, 신고할 뻔! 세팅 좀 해놓으라니까, 아...
소맥을 두 잔 말았다. 똥집 튀김을 앞에 두고 잔을 부딪쳤다. 짠 하자, 오랜만이네. 첫 잔을 단숨에 비웠다. 공부는 잘 돼가나.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다. 몰라, 그냥 하는 거지... B의 한숨 섞인 대답에선 현실의 무게감이 잔뜩 묻어났다. 갑자기 기자가 되겠다는 B의 말에 깜짝 놀랐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찾아 힘든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멋짐과 별개로 B가 헤쳐 나가야 하는 건 퍽퍽한 현실이었다. 서울에서 홀로 비싼 방세와 학원비를 감당하며 생활을 해나가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B는 남들에 비해 늦게 시험 준비에 뛰어들어 어려움이 더 많았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와 관련한 글을 쓰는 행위는 B에게 낯선 작업이었다. 특히 글쓰기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술을 몇 잔 주고받다가 B는 글쓰기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쓴 글을 한번 읽어보라고 한다. 약 일 년 만에 만나 간만에 회포를 푸는데, 술잔이 아닌 글쓰기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하다니. 다만 B에겐 꽤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B가 내민 글을 한 편 읽어보았다. 음... 우선 수식어가 눈에 띄게 많고, 철학자나 사상가 인용구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등장하는 거 같네. 글이 조금 난잡한 느낌? 아는 걸 이것저것 쑤셔 넣어서 뭔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정작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고. B가 충격받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와, 심한 거 아니가. 독설 보소. 나한테 좋은 얘기 들으려고 보여준 건 아니다이가. 키득키득하며 계속 얘기를 주고받았다.
- 야, 우리 동아리 활동할 때, 너가 맨날 책 읽고 글만 쓴다고 우리가 엄청 놀려댔잖아. 근데 요즘엔 너가 부럽더라. 나도 너처럼 옛날부터 글 많이 썼으면 기자 시험 준비하는 게 좀 더 편할 텐데. 그때 나보고 글 좀 쓰라고 뭐라 했어야지!
- 말이라고 하냐... 내가 너희들을 책과 글의 세계로 인도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다 실패했지... 맨날 오타쿠라고 놀리기만 하고, 책 그만 읽고 연애 좀 하라면서 뭐라 하고.
- 너가 예전에 여자 친구랑 단둘이서 자취방에 갔는데, 집에서 같이 책만 읽었다 했잖아.
- 그거 가짜뉴스라고! 기자 준비하는 놈이 이상한 것만 들어서...
B는 동아리에서 인기가 많았다. ROTC 출신이라 그런지 누구에게나 깍듯했다. 홀로 몇 달간 해외여행을 다니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예쁜 여자친구와 20대의 절반은 함께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잘생겼다. 누가 봐도 호감형인 외모였다. 이건 노력해도 안 되는 거라서 더 억울했고, 또 부러웠다. 그런데 뭐라는 거냐. 갑자기 나보고 부럽다니. 장난하냐... 마, 한잔해라.
20대의 대부분을 오로지 읽고 쓰는 행위로 채웠다. 덕분에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어도 글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운이 좋아 그동안 쓴 원고들을 모은 첫 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양손에 쥐고 있으면서, 새로운 걸 또 손에 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야, 나는 요즘 무슨 생각 드는지 아나. 너는 그래도 누군가랑 4~5년을 만나면서 진짜 사랑이란 걸 해봤잖아. 내가 허구한 날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책 읽고 글 쓸 때,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제 20대가 끝나 가는데,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내 책이 나온다니까 뭔가 묘하더라. 남들이 봤을 땐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뭔가 허전함? 공허함? 아쉬움? 뭐, 이런 게 있더라고. B가 내 말을 가로채더니 이내 잔을 들었다. 배부른 소리 하네. 좋은 사람 만나겠지. 벌써 막잔이냐? 짠 하자.
안주가 반이나 남았는데 술이 다 떨어졌다. 술 좀 더 먹자는 얘기에, B가 손사래를 쳤다. 내일 아침 일찍 스터디가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친구 왔는데 오늘도 밤 11시 넘어서 만나고, 내일 일찍 나가야 돼서 술도 얼마 못 먹는다고? 마, 장난치나. 아, 진짜 안 된다. 중요한 스터디다. 결국 술 대신 안주만 집어 먹었다. 이미 식어버린 똥집 튀김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간만에 술자리가 조금 싱겁게 끝나버리는 걸까. 다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었다. 2년 넘게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의 상황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 B도 재미없는 스터디 대신 지금 이 술자리를 좀 더 즐기고 싶겠지. 아쉽긴 해도, 아쉬운 그대로 간직해야 할 마음이었다.
약 두 시간의 술자리가 끝이 났다. 잘 준비를 했다. 둘 다 곧장 잠이 오지 않아 불을 끈 채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이럴 거면 술 좀 더 마시지. 아, 스터디 가야 한다고... 무슨 술꾼이냐. B는 동아리 사람들이 각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했다. 뭐, 다들 직장에 다니거나 취업 준비하지. 우리도 다 같이 보는 경우는 잘 없다. 만나는 사람끼리만 만나지, 뭐. 그렇나... 다 잘 됐으면 좋겠네. 니부터 잘돼라, 인마. 그러게...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나이는 계속 먹어가고 있고, 이것만 파고 있는데... 진짜 안 되면 어떡하냐... B의 말이 유난히도 서글프게 들렸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 새벽 세 시다. 잔다. 대화도 끝났고 눈도 감았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진짜 안 되면 어떡하냐... B의 마지막 한마디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