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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Aug 05. 2019

행복이란 무엇인가

정말 소크라테스도 울고 갈 철학적인 자리였다

  우선 생고기 3인분을 주문했다. 다들 저녁도 안 먹었는데 1차로 고깃집이라니. 여기 1인분에 얼마지? 메뉴판을 보니 6천 원이라 적혀 있었다. 대학가 앞은 4천 원이던데, 역시 서면은 비싸구나. 술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선과 카스 각각 한 병씩 시켰다. 어느새 소맥 몇 잔을 먹고 소주로 달리는 게 술자리 습관이 되었다. 섞어 먹으면 숙취도 심하고 몸에도 안 좋다는데. 그래도 빈속에 소주를 먹는 것보단 나았다. 어차피 몸 생각할 거면 술자리 자체를 안 왔어야 한다. 소맥을 말았다. 짠! 아직 고기가 안 왔지만 한잔 쭉 들이켰다. 일주일간 묵힌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내일 출근 걱정도 할 필요 없었다. 역시 술자리는 금요일 저녁이 가장 좋다.


   오늘의 술자리는 A 형과 여자 후배 B와 함께였다. 늘 A 형과 단둘이서 먹곤 했는데, 모처럼 세 명이 만났다.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는 더욱 좋아하지만, 대부분 술자리는 남자밖에 없었다. 인간관계가 그리 좁은 것도 아니고 휴대폰에 남자 번호만 잔뜩 저장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내가 가는 술자리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고민 상담을 하거나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아무래도 이들이 편했다. 나라는 사람이 워낙 무거운 편이고, 진지한 얘기를 좋아해서 일까. 이런 점에서 B는 조금 특이했다. 진지한 얘기를 좋아하고 남자가 많은 술자리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쉽게 어울리곤 했다. 오히려 먼저 진지한 얘기를 꺼내곤 했다.


   - 아, 행님. 제가 굽겠습니다!

   - 싫다. 내가 구울 거다. 술잔이나 채워도.


   고기가 한 점 한 점 불판 위에 올라갔다. 치이익- 좀 더 신박한 표현 방법이 없을까 싶었지만 고기가 불판 위에 올라가는 소리는 ‘치이익-’만큼 어울리는 단어가 없는 거 같다. 누가 먼저 이 표현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경의를 표한다. 정오야, 마늘 좀 더 가져 온나. 아, 양파도. 오빠, 제가 가져올게요. B의 대답에 반쯤 들린 엉덩이는 다시금 내려갔다. 알았다, 니가 가라. 이야, 박정오 매너 봐라. 그러다 연애 못 한다. A 형의 말에 대답한다. 쟤랑 안 할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참내, 저도 싫~거든요. B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마늘을 가지러 갔다.


   오늘은 또 심오한 주제가 안 나오나 생각할 때쯤, 아니나 다를까, 한없이 깊고 철학적이고 난해한 주제가 나왔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을 테지만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했던 질문. 무려 ‘행복이란 무엇인가’였다. 나도 진지한 얘기 좋아하긴 하는데, 이건 술자리가 아니라 스터디 아닌가. B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요, 가족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꿈을 향해 열심히 사는 것도 멋있긴 한데, 그보다 화목한 가정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 같아요. 특히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반기를 들었다. 야, 화목한 가정은 결과적인 거 아니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싶은데. 가정을 위해 노력한다고 가족들이 꼭 행복하다는 보장도 없고, 꿈을 위해 노력한다고 가족들이 불행하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냥 자기 꿈이라는데 왜 뭐라 하노. A 형의 지적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뭐, 토론하자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A 형이 오히려 B 보고 뭐라 한다. 현실과 타협했네. 우리 앞으로 같이 술 먹지 말자. 여긴 현실과 타협 하지 않은 사람들의 술자리다. 우와~ 오빠, 그런 게 어딨어요! 티격대격하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니들한테만 솔직히 말할게. 솔직히 내는 교수 돼서 신분상승하고 싶다. 누구나 노력하면 뭐든 된다고 하는데, 살아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아직 한국 사회엔 신분이 있더라고. 내가 어떻게든 교수가 되면, 내 신분이 바뀌는 거 아니가. 그러면 내 자식들은 훨씬 편하게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하고,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고. 나는 그렇게 못했으니까, 내 자식은 그렇게 키우고 싶다.


   3인분은 금세 바닥나고 말았다. 저기요, 생고기 2인분 더 주세요. 아, 카스도 한 병 더요. 오빠, 이제 제가 구울게요. 아, 됐다. 주고 싶을 때 줄 거다. 밑반찬 좀 더 들고 온나. 고기는 왜 안 나오노. 다시금 점원을 불러 확인해 보니 주문이 안 들어갔다고 한다. 다시 주문하니 금세 고기가 나온다. 치이익- 기분 좋은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진다. 행님,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행님 마음 이해는 되는데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고 싶은 거 다 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게 현실 아닙니까. 저는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보단 그 반대 과정에서 더 배우는 게 많은 거 같습니다.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게 있고, 사고 싶어도 못 사는 게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진짜 삶을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 그럼 오빠는 행복이 뭐라 생각하는데요.


   B가 옆구리를 훅 치고 들어온다. A 형과 B의 생각에 대해서 열심히 품평만 하다가, 이제 내가 얘기할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비판 비난 품평 피드백 태클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실컷 비판 비난 품평 피드백 태클 걸어놓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거다. 에이, 술이나 마십시다. 짠. 원 샷 하고 나서 얘기해라. A 형의 말에 먹다가 체할 뻔했다. 내가 만든 덫에 내가 걸리다니.


   저는요, 예전에는 막 사회적인 영향을 끼치고 많은 사람한테 인정받고 유명해지는 게 제가 행복해지는 길이라 믿었어요. 제 꿈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거로 행복해질 수 있긴 한 걸까 의문이 들더라고요. 야, 여기 김치말이국수 맛있데. 하나 시킬까. 네, 오빠. 시켜요.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건 비교 대상이 늘 있잖아요. 일 억을 벌어도 십 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듯이, 책 열 권 출간하고 강연 백 번 해도, 책 스무 권 출간하고 강연 이백 번 하는 사람이 또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비교 대상이 없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 딱 이런 술자리더라고요. 어차피 먹고사는 건 존나게 힘들고 짜증나기도 하고 힘든 일도 끊이지 않으니까. 아무리 돈 많이 벌고 유명해져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술 한잔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짜증나게 하는 사람 뒷담화도 하고 사회 욕도 하고 막 이런 게 행복 아니겠습니까. 딩동! A 형이 이야기를 듣다 말고 갑자기 벨을 눌렀다. 여기 김치말이국수 하나요! 먹고 싶으면 먹고! 얼마나 좋습니까. 오, 오빠 오랜만에 멋있는 말하네요. 여전히 노잼이긴 하지만. 이런 건 비교 대상이 없잖아요. 그래봤자 안주 비싼 거, 술 더 비싼 거 먹는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제 결론은, 바로 이 자리가 행복이다, 이겁니다. 정말 소크라테스도 울고 갈 철학적인 자리였다. 나도 엄청 진지한 사람이긴 한데, 이제 좀 가벼운 얘기 좀 하고 싶다. 연애 얘기? 그런 거. 어쨌든 한 바퀴 돌았으니까,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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