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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Jun 20. 2020

연봉이 높아진다고 생활도 그만큼 풍족해지진 않더라고

성실히 살아봤자 평생 집 한 채 못 살 게 뻔한데, 발버둥이라도 쳐야지

   니 내일 여섯 시 반에 나가야 한다고 안 했나. 나가야지. 조금만 먹으면 된다. B는 자그마한 상을 펼치더니, 이내 냉장고에서 맥주 피처를 꺼내 큼지막한 맥주잔 두 개와 함께 가져왔다. 안주 뭐 필요하나. 배는 부른데, 간단한 거 뭐 없나. B는 다시금 부엌으로 가 수납장을 뒤적이더니 나쵸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오, 딱 좋은데? 소스도 있다. 그렇게 조촐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짠하자- B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잔을 내밀었다. 유리잔이 부딪혀 내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 후 잠시 적막해진 방안에선, 이내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는 소리가 자그맣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20대 대부분을 함께 보낸 대학 친구들과 몇 달 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10년을 딱 붙어 지내다 보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무척 가깝지만 또 그만큼 위험한 관계이기도 했다. 20대가 영원할 거라 믿으며 젊음을 한없이 만끽한 우리는 어느새 서른이 되었고, 취업과 함께 몇몇은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다 같이 모이는 일이 1년에 채 몇 번도 안 되는, 그마저도 참 쉽지 않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오랜만의 술자리는 무척 반갑게 다가왔다. 이런 모임이든 휴가를 맞춰 놀러가는 일이든 일정을 잡고 계획하는 건 대부분 B의 몫이었다. B는 우리 다섯 명 중 가장 꼼꼼하고 일을 잘했다. 물론 모든 건 상대적이었다. B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아무래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무려 한 달 전에 잡은 토요일 저녁 약속이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B는 금요일 오후가 돼서야 주말 새벽 근무가 잡혔다고 이야기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새벽 6시 반 출근, 오후 3시 퇴근이라 했다. B는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회사보다 안정적이고 체계적일 거라 믿었는데, 주말 근무가 금요일 오후에 잡히는 게 말이 되는가 싶었다. 다만 나의 의문과 무관하게 B는 약속 당일에 근무를 마치고 도착했다. 다음 날 근무라서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몇 모금만 찔끔찔끔 마실 뿐이었다. B는 우리 다섯 명 중 가장 먼저 취업을 했고, 그래서 얼마 전 대리를 달았다. 그런 B에게 선뜻 축하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10년 지기 친구들과 마음 편히 술 한잔하지 못 하는 B의 모습은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렇게 모처럼의 다섯 명에서 모인 술자리는 불과 열 시도 되지 않아 마무리 되었고, 타지에서 온 나는 B의 집에서 묶기로 하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      


   야,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 대기업인데, 근무가 그렇게 갑자기 잡히냐. 원래 이렇다. 나의 물음에 B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도 한 달 전에 잡은 주말 약속인데, 그렇게 갑자기 나오라 하면 다 나가야 하나. 당연하지. 비행기 표를 끊어놓아서 어쩔 수 없거나, 심각한 집안일 있는 거 아니면 무조건 출근해야 한다. 이내 B를 향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러니까 대학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하지. B는 대학 시절 학점도 잘 받고,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어학 점수도 높고, 대외활동도 많이 해서 대기업에 취업한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게, 니만큼만 할걸. 그렇게 서로 키득거리며 다시금 잔을 기울였다.     


   기업이 크다 보니까 위로 올라갈수록 압박도 심해지고, 일은 더 많아진다. 오히려 대기업이니까 더 심한 편이지. 예전에는 부장 달고 임원까지 도전하려는 사람이 많았다는데, 요즘 애들은 일이 무지하게 많은 거 아니까 승진에 별 관심이 없더라. 니도 요즘 애들 아니가. 이제 겨우 서른인 놈이. 당연하지, 나도 요즘 애들이지. B는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아무튼, 뭐. 대기업 다녀도 힘들고 막막하다. 작년에는 6개월이나 인도 출장 다녀왔다이가. 진짜 가기 싫었는데 회사에서 가라고 하니까 억지로 간 거고. 그러다 여자친구랑도 헤어졌으니까, 뭐. 그리고 작년에 계산해 보니까 주말 100일 중에 80일을 일했더라. 한 달에 겨우 이삼 일 쉰 거지. 근데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일한 만큼 돈도 못 받는다. 그래도 대기업이긴 하니까 환경이 열악하다, 대우가 나쁘다 말도 못하고. 뭐, 나보다 힘든 사람도 있겠지만, 나도 먹고살기 힘들다. B의 신세 한탄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니도 주식한다고 했제. 화제도 돌릴 겸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어,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다 내려가서 완전히 망했다. 돈을 제법 잃었을 텐데도 B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 주변에도 다들 주식 주식 하면서 난리더라. 요즘엔 우리 엄마도 주식이랑 부동산에 완전히 빠지신 거 같고. 안 하면 바보라면서, 다들 나 주식하게 만들려고 안달 난 거 같다.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B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월급만 모아서는 절대 집 못 사는 시대니까. 또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B가 그런 말을 하니 왠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야, 그래도 너는 일 년에 6천, 7천을 버는데, 잘만 모으면 집 살 수 있잖아. 뭐라노. 일단 세금 엄청 내고, 일 년에 많이 모아봤자 2천이다. 5년 꼬박 모아도 1억, 10년 꼬박 모아도 2억인데, 이걸로는 전세도 못 들어간다. 너가 왜 일 년에 2천밖에... B의 말에 반박하려다,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니 이내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한 달에 이백만 원 정도 꼬박 모아야 일 년에 2천만 원 정도였다. 고작 서른 살이 한 달에 이백만 원 저금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야, 그래도... 차마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B는 금세 맥주잔을 비웠다. 내일 일찍 나가야 한다고 술자리에서는 찔끔찔끔 마시더니, 그동안 참아왔던 욕구가 폭발했는지 B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연봉이 2~3천인 사람이랑, 6~7천인 사람이 똑같은 상황이라고 할 순 없잖아. 나의 반박에 B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치. 숫자상으로는 연봉이 2배, 3배 더 많긴 한데, 그렇다고 생활이 2배, 3배 더 풍족해지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냥 돈 걱정을 조금 덜 하게 되고, 조금 더 쓰는 정도지, 펑펑 쓰면서 사치 부릴 만한 수준은 안 된다. 문득 B가 복학 후 샀던 옷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모습이 생각났다. 무려 7년이나 지난 옷은 여전히 옷걸이 앞쪽에 보란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다 접는 부분이 망가져 불편하게 잡고 사용해야 하는, 작년에 B의 집에 머물 때 봤던 반쯤 망가진 드라이기도 문득 떠올랐다. B는 결코 헤프게 돈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연봉에 비해 알뜰하게 사는 편에 속했다. 그런 B의 말은 단순한 엄살을 넘어 묵직하게 다가왔다.     


   우리 아버지도 대기업에 다니셨거든. 내가 취업 때쯤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몇몇 유형으로 나누어진다고. 누구는 월급을 받는 대로 펑펑 쓰고, 누구는 월급의 대부분을 착실하게 저금하고, 또 누구는 주식이나 부동산에 관심 가지면서 돈을 굴리려고 노력한다더라. 몇 년 정도는 세 그룹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 20년, 30년이 지나서 은퇴할 시점이 되니까 격차가 엄청 벌어졌다 하더라고.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돈을 굴렸던 사람이 착실하게 저금한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모아서 풍족하게 잘 살고 있다더라. 나도 그 얘기 듣고 주식 시작했지, 뭐. 대박 터뜨린다거나 인생 역전하겠다는 건 아닌데, 아무것도 안 하고 성실하게 저금만 하면 진짜 아무것도 안 될 거 같으니까. 그렇게 성실히 살아봤자 평생 집 한 채 못 살 게 뻔한데, 발버둥이라도 쳐야 할 거 아니가. 다들 좋아서 주식 하겠나, 그냥 답답한 마음에 하는 거지. 이런 불안함에 대기업 중소기업이 따로 있겠나. B는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야, 천천히 무라. 내일 출근해야지.     


   *      


   맥주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니 이렇게 술 마시고 싶었는데 우째 참았노. 돈 벌러 가야 하는데 그냥 참는 거지. 뭐, 결국 못 참았지만. B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제 막잔하고 잘까. 그러자, 나도 피곤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황금 같은 토요일이 이렇게 끝나다니, 아쉬움에 한숨이 절로 나오려다가도 6시간 뒤 출근을 해야 하는 B의 모습이 떠올리니 한숨은 쏙 들어갔다. B와 나는 잘 준비를 마치고 곧장 자리에 누웠다. 대기업 다니는 것도 참 쉽지 않구나. 우리 인생 진짜 답이 없네. 장사나 할까. 장사하면 더 힘들지. 답은 결국 주식이가. 아니, 부동산도 있다. 돈이 있어야 부동산 하지. 더 답이 없네. 그냥 금수저로 태어나는 게 최고지. 니 금수저 아니가. 우리 아버지 대기업 다니셨어도, 내가 대학 때 펑펑 쓰더나. 여자 꼬실 땐 펑펑 썼다이가. 내일 아침에 꼭 같이 아침 먹자. 내 일어날 때 깨워줄게. 아, 제발. 그럼 집 어지럽히고 나갈 거다. 다섯 시 알람 맞춰 놓았다. 꼭 깨울게. 아, 미안. 그렇게 티격대격 하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언제 서로의 고민을 쏟아 부었냐는 듯,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이야기가 오가던 방안도 어느새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 미래만큼이나 깜깜한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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