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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Sep 02. 2019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행복하다는 거죠!

불행의 끝자락에선 늘 행복의 씨앗이 뿌려지는 걸까

   술기운이 점점 올라왔다. 알딸딸한 기분은 웃음의 벽을 한없이 허물었다. 소소한 얘기만으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며 외식을 하는 것도, 술을 마시며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것도 모두 행복으로 다가왔다. 장어가 몇 점 남지 않았다. 아버지는 얼른 먹으라며, 노릇하게 구워진 장어 한 점을 집게로 집더니, 이내 내 앞에 놓인 접시에 담아줬다. 나는 반대로 아버지 앞에 놓인 빈 술잔을 채웠다. 함께 잔을 기울였다. 아버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이야기했다. 벌써 8년이나 지난 일,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공교롭게도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다. 불행의 끝자락에선 늘 행복의 씨앗이 뿌려지는 걸까. 아버지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착하게 잘 자라줘서 너희에게 정말 고맙다고 했다. 우리 가족, 이 정도면 정말 행복한 거다, 어머니가 거들었다.


   마지막 한 점은 동생에게 건넸다. 다시금 메뉴판을 확인했다. 곰장어 한 판 시키죠. 저기요! 여기 곰장어 하나 주시고요, 불판 좀 갈아주시겠어요? 아들, 돈 많나. 비쌀 텐데. 아니요, 엄마 생신인데 아들이 이 정도는 사야죠! 잠시 후 점원이 와서 장어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불판을 가져갔다. 그러곤 자그마한 연탄 하나를 더 넣었다. 불길이 눈에 띄게 살아났다. 이내 새 불판을 가져왔다. 어무이, 아부지. 제가 중학생 때인가? 어무이랑 아부지가 한푼 한푼 아끼면서 평생 모은 돈으로 집 한 채 샀었잖아요. 부동산값이 오를 거라 믿으면서요. 그런데 막상 기대했던 것처럼 안 오르니까 괜히 아쉬워하고, 서로 다투고 그랬었잖아요. 그리 큰돈을 모은 것도 아니었고, 떼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곰장어가 나왔다. 분홍빛의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동생은 징그럽다며 기겁을 했다. 무봐라, 맛있다. 아버지는 곰잠어를 한 점씩 불판에 올렸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곰장어가 구워지기 시작했다. 엄마아빠가 언제 싸웠다고 하노. 니는 맨날 우리가 싸우는지 알제? 에이, 제가 기억하는데요. 어머니 핀잔에 웃으며 대답했다. 있잖아요, 살면서 돈이 필요한 건 맞는데, 막상 돈이 많은 사람을 보면 대부분 그런 거 같아요. 돈이 많아서 부부끼리 갈라서고, 부모랑 자식이 다투고, 형제끼리 싸우고요. 있잖아요. 한 번씩 상상해요. 만약 우리 가족이 8년 전에 사기를 안 당했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그때 1억 5천이었죠? 꼬박꼬박 모았으면 지금 2억에서 3억 정도 되었겠죠. 형이나 저나 대학교 다닐 때 해외여행 두세 번 갔을 수도 있고, 해외연수 다녀왔을 수도 있겠네요. 동생도 좀 더 비싼 브랜드 옷 입었겠죠. 아부지는 아마 남들처럼 골프 치고 다녔을 테고, 어무이도 비싼 가방, 비싼 옷 입고 비싼 음식 먹으면서 여기저기 놀러 다녔겠죠. 그런데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이런 술자리를 없었을 거라고요.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이 나를 향한다. 반대로 동생의 따가운 눈총이 아버지를 향했다. 애써 못 본 척하며, 점원이 준 소주를 잽싸게 받았다. 오랜만에 아들이랑 술 마시니까 좋네. 이렇게 즐거운 날에, 한 병 더 마셔야 하지 않겠소? 아버지의 대답에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났다, 아빠나 아들이나, 둘 다 술을 좋아해서... 2억, 3억 있으면 뭐, 그대로 뒀겠습니까. 집을 사든, 주식을 하든, 어떻게든 돈 굴리려고 했겠죠. 그러다 잘되면 상관없겠지만, 안 되면 또 서로 탓하고, 싸우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잘 되어서 돈 많이 벌어도 오히려 더 다툴걸요? 괜히 돈 때문에 이혼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대기업 회장, 정치인들 보소, 다 돈 때문에 그렇게 치고받고, 또 집에서도 치고박고 하지 않습니까. 뭐이리 말이 많노. 이거나 무라. 어머니는 갑작스레 쌈 하나를 내 입에 쑤셔 넣었다. 상추와 방아잎, 양파절임, 곰장어가 씹혔다. 우걱우걱 씹어댔다. 그래도 결론은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지금 행복하다는 거죠! 짠 합시다! 다 같이 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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