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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Oct 09. 2019

이럴 거면 그냥 돈 많이 받는 다른 분야로 취업하든가

편집자로서의 철학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고 모조리 돈에 팔아버린 것만 같다

   회사 메일로 괜찮은 작품이 하나 투고되었다. 투고 원고가 단행본 출간까지 이어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이번 작품은 뭔가 매력이 느껴졌다. 대표님과 함께 좀 더 꼼꼼히 검토해보기로 했다. 페미니즘 에세이였고, 저자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20대였다. 책을 쓰고 데뷔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었지만,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재가 무척 신선하면서도 강렬했고, 지금 트렌드에도 딱 맞았다. 이 책을 출간할 건지에 대해 대표님과 논의를 했다. 출판사에서 1부터 100까지 모든 돈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기획 출판의 경우 위험 부담이 큰 편이기에 대표님이 쉽게 허락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작품은 한 번 내보자고 말씀하셨다.


   다만 내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대표님께 얘기했다. 저자가 어려서 책이 나와도 관심 가져주거나 책을 구매해줄 사람, 즉 '저자 파워'가 너무 부족하지 않겠냐고. 소재도 좋고 글도 좋긴 한데 출판사에서 돈을 다 대면서 책을 내기엔 부담이 크지 않겠냐고. 이런 내 얘기에, 대표님은 돈이나 판매보단 작품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정 어려우면 소셜 펀딩으로 초기 비용을 부담할 수 있지 않냐고 되물으셨다. 오로지 작품만 본다면 나는 좋다고 했다. 출간이 결정되었다. 회신을 보내기로 했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까지 답신 메일을 작성했다. 원고 투고 감사하다고, 작가님이 보내주신 작품이 우리 회사가 지향하는 바와 비슷하다고, 작업을 함께 해보면 좋겠다고, 정성스레 작성한 답신을 보냈다.


   *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광안리 바닷가가 훤히 펼쳐졌다. 작가님께 언제 답장이 올지 모른다. 아마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했을 테고, 만약 우리 말고도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온 출판사가 있다면 우리는 선택지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아무튼 공은 이제 넘어간 셈이다. 우리 회사 저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톡톡 튀고 패가 넘치는 젊은 저자와 작업할 가능성이 생겼기에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드넓게 펼쳐진 바다도, 그 위에 그림 같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광안대교의 모습에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울했다. 무언가 꽉 막힌 느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팔리는 책'보다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어 했다. 저자가 유명하지 않아도, 책 판매량이 보장되지 않아도, 내가 생각할 때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기획하면 사람들이 좋아해 줄 거라 굳게 믿었다. 오히려 회의 때마다 내가 그런 작품을 제안했고, 대표님은 저자의 인지도, 판매 예상 부수 등을 이유로 반대하곤 했다. 그렇게 기획안 몇 개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의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소재만 좋으면 된다, 글만 좋으면 된다, 작품성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 암시를 걸곤 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전에 대표님께 들었던 얘기를, 반대로 내가 대표님께 그대로 하고 있었다. 당시 그런 얘기를 들으며 못마땅했던 거 같은데, 아무리 회사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도 우리는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며 속으로 삭였던 거 같은데. 그랬던 내가 고작 1년 사이에 이토록 변할 줄이야. 작품을 보기보다 저자의 인지도를, 나이를, 유명세를, 인맥을 보고 있었다. 돈을 먼저 보고 있었다. 내 신념과 가치로 똘똘 뭉친 작품이 시장에서 별 반응 없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본 탓일까, 그 경험이 아픈 기억으로 남은 탓일까. 그럼에도 지금의 행동이 합리화되지 않는다. 이제 고작 두 권 만들었으면서, 누가 보면 수십 권은 만든 줄 알겠다. 지금의 나는, 그저 돈만 준다고 하면 그 어떤 책이라도 다 만들어줄 기세다. 편집자로서의 철학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고 모조리 돈에 팔아버린 것만 같다. 내 모습이 이토록 실망스러울 줄이야. 한심함을 넘어 스스로에 대한 불쾌함, 환멸로 이어진다. 이럴 거면 그냥 돈 많이 받는 다른 분야로 취업하든가. 내가 편집자 직함을 달고 있어야 할 당위성마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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