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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Oct 25. 2019

혹시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 없어요?

저는 지역 출판사 편집자입니다

   - 정오 씨도 좀 더 큰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어요? 부산에서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서울에서 일하면 정오 씨 미래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은데. 혹시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 없어요?


   A 대표님은 서울에서 오랫동안 출판업에 종사하다, 몇 년 전 1인 출판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기획한 책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편집자가 꿈꿀 수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가. 자신이 기획한 책이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 인터넷 서점 판매지수가 올라가고, 오프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혹은 '주목받는 신간' 코너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것. A 대표님은 이미 나의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런 분이 지금 내게 서울에서 일하는 걸 권하고 있었다. 그냥 해 본 말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마침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회사 대표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라, A 대표님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출판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후, 서울 혹은 파주의 유명한 출판사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자본도 많고,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고,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고, 출판 트렌드나 이슈 등 새로운 정보도 빠르게 얻을 수 있고,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타이밍에 맞춰 척척 기획해내는 모습을 늘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거기에 비해 뭐 하나 갖춰진 것 없이, 늘 맨땅에 헤딩하듯 책을 기획하고 마케팅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하게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기획한 책이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내 능력을 탓했다. 내가 경험이 없어서,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자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내 역량이 부족한 탓일까. 같은 콘텐츠라도, 같은 표지의 같은 내용의 책이라도, 서울의 큰 출판사에서 책이 나왔으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릿속은 열등감과 무기력함으로 가득해졌다. 지역에서 이렇게 아등바등 책을 만들고 있지만,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레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일을 하면 어떨까, 서울에서 책을 기획하면 어떨까.


   A 대표님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저 사실, 대표님 말씀처럼 서울을 경험하고 싶긴 해요. 지역에 있다 보니까 한계도 많이 느끼고, 한계가 쌓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안일해지는 거 같고요. 지역에서는 조금만 잘해도 박수를 쳐주니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되는 느낌도 들어요. 나름의 고민은 많지만, 온실 속에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저도 출판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서울이나 파주에 가서 쟁쟁한 편집자들과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아직 20대인데, 깨지고 넘어져도 괜찮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있잖아요, 저는 그런 걸 느껴요. '지역 출판사 편집자의 사명감'이랄까. 저희 회사 대표님은 어렸을 때 음악을 했고, 문화기획에도 잠깐 발을 담그다 출판사를 만들었잖아요. 그러고 딱 10년이 되었을 때 제가 들어왔어요. 저희 대표님도 출판사 경험이 없다 보니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해요. 그래도 무려 10년을 버티면서 이제 자리를 잡았고요. 덕분에 저는 비교적 일찍부터 일을 배우고 있어요. 결코 편하다고 할 순 없지만, 대표님이 처음 시작할 때보단 훨씬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조건 속에서 말이죠. 이건 제가 받은 혜택이고, 제가 편집자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에요. 멋모르고 들어와 우연히 편집자 직함을 달고 있지만, 결코 가벼운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한편으론 의무감도 느껴요. 저 개인을 위해서는 좀 더 큰물에서 일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그 순간 지역 출판사 편집자가 한 명 사라지는 거잖아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출판업의 특성상, 서울에서 일하다 보면 그대로 자리 잡을 확률이 높기도 하고요.


   욕심을 부리자면, 저는 하나의 사례가 되고 싶어요. 지역에서도 출판사 편집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서울과 파주의 편집자 못지않게 멋진 책을 기획해서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다는 걸,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실패하면 어쩔 수 없지만, 성공한다면 한쪽에 치우친 지금의 출판문화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회사 대표님이 10년간 고군분투하며 지금의 환경을 만들어준 덕분에, 제가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지역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서울에 있는 편집자와 견줄 만한 경쟁력이 갖춘다면, 제 후배 세대는 저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문화’라는 게 온갖 정책이나 사업 등이 아니라, 이렇게 개인이 성장하면서 한 곳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믿어요. 저는 지역 출판사 편집자이고, 당연히 여기에 맞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해요. 비어 있는 A 대표님의 잔을 채웠다. 때마침 회사 대표님이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회사 대표님의 물음에 멋쩍은 미소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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