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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6. 2019

대표님은 월급이 없다

자기 밑에 직원들 월급 챙기기에도 빠듯한 사정이다 

   사무실이 잠겨있다. 디자이너 선배님이 오늘 하루 쉰다고 했던 건 기억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 걸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하다.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전기를 올린다. 불이 켜진다.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 아무도 없으니 나도 좀 쉬기로 한다. 의자에 발을 턱 올리고, 회사 컴퓨터로 유튜브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소리 빵빵 키워서 듣고. 캬, 놀면서 돈 버는 기분이다.


   대표님께 전화가 온다. 급하게 소리를 낮추고 전화를 받는다. 오전에는 어디 어디 심사가 있고, 오후에는 또 강연이 하나 잡혀있다고 한다. 고로 오늘 사무실에 출근 안 하신다는 얘기다. 할렐루야. 오후가 되니 우리 사무실이 있는 공간 대표님과 매니저 형이 뒤늦게 출근한다. 오전에 라디오 녹음을 하고 오는 길이라 한다. 공간 대표님은 오후에 또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한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심사를 하고, 컨설팅을 하고, 발제를 한다고 무척 바쁜 사람이다. 공간 매니저 형은 부산에 있는 한 신문사에 몇 년째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 중이다. 이따금 다른 매체에서도 원고 청탁을 받곤 한다. 원고 마감이 다가오는데 글이 안 써져서 걱정이라 한다. 역시나 바쁘고 정신없는 사람이다. 


   *

 

   회사 대표님부터 시작해 공간 대표님, 공간 매니저 형까지, 다들 바쁜 사람들이다. 나 역시 나름 터프하게 살아온 거 같은데, 많은 것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충분히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들 앞에 서면 지극히나 평범해진다. 이들 앞에서 바쁘다고 말하는 건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다. 아무래도 이 집단에서 내가 가장 한가하고, 또 안정적인 사람인 거 같다. 안정이라는 단어를 그토록 싫어했는데.


   특히 두 대표님은 월급이 없다. 자기 밑에 직원들 월급 챙기기에도 빠듯한 사정이라, 다들 외부 활동으로 돈을 번다. 교육, 강연, 심사, 컨설팅, 원고 청탁 등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평일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게 자기 월급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40대 초중반의 중년 남성, 대기업이라면 퇴사 압박을 받거나 승진 경쟁으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나이인데, 일반 기업이라면 위에서 짓누르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나이인데, 그래도 이들은 폼 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회사에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없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자기 월급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이 얼마나 멋진가. 물론 일과시간과 퇴근시간,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모호하고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제대로 된 취미 생활 하나 가지기도 힘들 정도로 퍽퍽하고 정신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수입의 높낮이는 있지만 바쁨의 높낮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항상 바빠 보이고, 또 실제로 바쁜 사람들이다.


   나 역시 이따금 원고 청탁을 받을 때가 있다. 책이 나온 이후 이따금 무대에 올라가는 기회가 있다. 일 때문에 서울에 출장 갈 일이 가끔씩 생긴다. 컨설팅까진 아니라도 글쓰기 혹은 출판 관련해서 내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연차가 거듭날수록, 출판이라는 분야에 전문가가 될수록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기 위해선 치열하게 살아남아야겠지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회사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만 같다. 그래도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입장이니 내게 주어진 업무는 해내야 한다. 외부 활동이 많아질수록 일과 시간에 끝내지 못한 일을 저녁 혹은 주말에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을까. 돈은 지금보다 좀 더 벌겠지만, 삶의 질은 영 안 좋아질 것만 같다.


   나도 언젠가 월급 만드는 사람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만 같다. 문화예술 분야에 들어온 이상, 이 일로 먹고살 각오를 한 이상, 당연한 수순이긴 하다. 폼 나는 일이고, 예전부터 동경했던 삶이긴 한데, 설렘보단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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