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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5. 2019

상태 안 좋은 편집자는 또 이렇게 방황하고 있구나

아무래도 평범한 직장인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고달픈 삶이다

   출판사는 책을 제작하여 세상 밖에 내놓는 역할을 하지만, 단순히 정해진 수량을 제날짜에 납품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출간 작업은 책의 기획부터 제작, 마케팅까지 프로세스 전반에 걸쳐 여러 작업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출간 후 저자 북토크가 있다. 필수는 아니지만 책 홍보에 도움이 되며, 경우에 따라선 저자를 위한 서비스 차원으로 출판사에서 준비하는 편이다.


   작가님께 연락하며 일정을 조율한다. 행사가 잡힌다. 포스터를 만든다. 행사를 어떻게 구성할 건지 고민한다. 홍보를 시작한다. 행사 당일이면 몇 시간 전부터 무대 세팅하랴, 다과 사오랴, 정신이 없다. 책상과 의자를 재배치하고, 마이크 상태를 점검하고, 피피티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한다.

 

   책을 기획하던 머리로 행사를 기획하고, 원고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다과를 세팅한다. 북 디자이너의 미적 감각을 빌려 천의 색깔, 장식품, 다과 등을 적절히 배치한다. 항상 책 뒤에 숨어서 글을 쓰던 편집자는, 무대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참가자들과 눈을 마주친다. 내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와 무관하게 북토크를 준비하기 위해선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


   참가자가 오면 안내를 시작한다. 행사가 시작한 후에도 뒤늦게 도착한 참가자를 안내한다고 바쁘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내가 출판사 편집자인지, 행사 기획자인지, 사회자인지, 케이터링 업체인지 구분이 안 간다. 투정을 부린다. 이런 잡다한 일을 하려고 출판사에 들어왔는가. 싫어하려면 한없이 싫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행사를 진행하고 관리하는 입장에서, 참석자처럼 강연에 완전히 빠져들긴 어렵다. 그렇다고 티 나게 딴짓을 할 수도 없다. 참 애매한 지점, 작가님의 이야기가 어깨너머로 들린다. 강연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이들의 고달픈 운명인가 보다. 이 모든 게 일이 된 이후, 강연이라는 것에,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것에 심드렁해졌다. 행사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큰 직장인. 그럼에도 어렴풋이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심드렁해지고픈 직장인의 마음을 자꾸만 건드린다.


   무대를 바라본다. 자신의 책이 나왔다는 사실, 무대 위에 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들떠있는 작가님의 표정에, 초롱초롱 빛나는 그 눈빛에, 환한 웃음에, 마이크를 잡고 있는 설렘 가득한 손에,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나에겐 그저 무난하게 쳐내야만 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소중한 자리라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온다. 편집자를 자꾸만 불편하게 만든다. 불평불만을 하던 스스로가 한심해지고, 남들처럼 회사일을 편하게 욕할 수 없는 현실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


   행사가 끝났다. 자그마한 규모의 북토크였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하고 진행하며 마무리하려니 쉽지는 않았다. 내가 책임 편집을 맡은 책도 아니었고, 재단에서 사업비를 받아 진행하기에 비용에 대한 걱정도 없었으며 작가님과 관계된 사람들이 대거 참석해줘서 홍보에 대한 걱정마저 없었다. 책도 제법 팔렸고, 사진도 예쁘게 나왔고, 작가님도 만족하는 거 같고, 우리 회사 이름도 많은 사람에게 알렸다. 중간에 곤란한 상황도 없어 무난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강연을 참 좋아하던 청년은 어느덧 적당히만 쳐내자는 목표만을 가진 채 행사가 끝나면 안도의 한숨을 푹푹 내쉬는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이게 사회생활이고 직장생활이라 믿는다. 매 순간, 모든 순간에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순 없다. 설렘이 반복되다 보면 삶이 힘들어진다. 적당히 해야 길고 오래 갈 수 있다. 


   다만 나에겐 별 문제 없이 무사히 쳐내야만 하는 무언가가 누군가에겐 꿈만 같은 시간이란 사실이, 나에겐 그저 숫자로 계산되는 단순한 일이 누군가에겐 기대와 설렘의 시간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씁쓸함과 서글픔 그리고 부끄러움을 선사한다. 아무래도 평범한 직장인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고달픈 삶이다.


   뭐 하나 명확한 게 없는 이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서글프면서도 설렘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상태 안 좋은 편집자는 또 이렇게 방황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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