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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6. 2019

소개팅에 성공하는 법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면, 소개 왜 받노. 그럴 거면 받지 마라

   불 좀 낮추자. A 형의 말에 버너 손잡이를 반시계방향으로 살짝 돌렸다. 버너 위에는 먹음직스런 닭도리탕이 놓여있었다. 아무리 양념을 해도, 닭요리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으며 거품을 뿜어내던 국물은 거품의 빈도수와 크기가 눈에 띄게 줄었다. 짠 하자. 행님, 저 내일 소개팅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내 술자리 주제는 '박정오의 소개팅'이 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왜 소개팅에서 먹히지 않는가에 대해 무려 30분이나 토론을 했다. 닭도리탕은 반도 안 줄어들었는데, 테이블엔 벌써 소주 두 병이 쌓여 있었다. 아니, 소개팅 하러 간다는데 무슨 심문이라도 당한 느낌이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정리하면 이랬다. 외모로 여심을 사로잡을 수 없으니, 유머감각과 매력이 중요하다 했다. 어떻게든 이성을 웃기라고 했다. 처음부터 모든 걸 보여주지 말고, 가진 걸 하나씩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주장이 너무 강하면 여자가 싫어하므로, 성격을 숨기라 했다. 책, 글쓰기, 사회 문제, 정치 등 무거운 주제를 얘기하면 여자가 질색하므로 최대한 가십거리 위주로 대화를 나누라 했다. 취미 생활이 너무 많다고 하면 바빠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 말을 아끼라 했다. 무조건 먼저 에프터 신청 하고, 영 싫은 게 아니면 못 해도 3번은 만나보라 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은 만나보고 판단하라고 했다. 


   짠도 안 하고 혼자 원샷을 했다. 아, 왜 혼자 먹노. 화났나. 아니요, 화난 게 아니라... A 형의 말이 맞았다. 사실 조금 화났다. 행님, 너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저는 책 읽고 글 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고, 취미 생활도 왕성하게 하는 사람인데, 그거 다 숨기면 대체 무슨 얘기합니까. 그리고 저는 진지한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랑 만나고 싶은데, 그것도 하지 말라 하면... 그리고 제가 소개팅에 나온 사람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데, 왜 무조건 에프터 신청해야 합니까. 제가 신청했다가 까인 적도 있는데요, 여자는 그렇게 에프터 신청 기다리다가 마음에 안 들면 까도 되고, 남자는 무조건 먼저 해야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물론 제 마음에 딱 드는 사람과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 저도 이상형이라는 게 있잖아요. 별로이면 별로인 거지, 왜 무조건 몇 번 만나봐야 하는 겁니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닭도리탕이 식었다. 다시금 버너 손잡이를 돌렸다. 불이 안 붙네요. 가스 떨어진 거 같은데... 저기요! 여기 가스 좀 갈아주세요. 이내 점원이 새 부탄가스 하나를 가져왔다. 소주도 한 병 더 주시고요.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벌써 소주 두 병이나 먹었다. 그런데 또 한 병을 먹다니! 하지만 토론에 불이 붙으니 술이 술술 들어갔다.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A 형이 입을 연다. 소개팅이 원래 그런 건데, 이왕 할 거면 잘돼야 할 거 아니가. 소개팅에서 자기랑 딱 맞는 사람 만날 확률이 얼마 되겠노. 평생 다른 환경에서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두 남녀가, 밥 한 끼 먹는다고 갑자기 서로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 이런 거 다 파악하는 게 말이 되나. 일단 외모로 서로에 대한 첫인상이 80-90% 결정되는 거지. 그래서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은 지 멋대로 해도 상관없다. 안 그래도 상대방이 먼저 관심 가져주고 잘해주니까. 근데 그게 아니라면,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니가. 나한테 딱 맞는 사람 만날 거라고, 너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거라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면, 소개 왜 받노. 그럴 거면 받지 마라.


   A 형의 강력한 역공에 순간 당황했다. 술잔을 기울였다. 닭가슴살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양념이 잘 배였는지 퍽퍽함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형식 안 갖춰도, 가식 안 떨어도, 가면 안 써도, 그래도 저랑 맞는 사람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있지. 그런데 소개에서 그런 사람 만나는 게 진짜 어렵다고. 니는 소개에 안 맞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왕 받는 거면 그런 부분을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지. 진짜 니 말대로 자기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되면 얼마나 좋겠노. 근데 있다이가,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그 속에서 니가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하지 않겠나. 


   결국 논리에서 밀리고 말았다.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를 괜히 젓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시스템을 비판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개인의 문제마저 시스템의 문제로 치부하며 합리화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이런 가치관과 철학을 유지한 채 연애를 잘하고 있으면 몰라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언젠간 나한테 꼭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며, 그저 환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그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으면, 환경을 탓할 게 아니라 내 방법에 문제가 없는지 돌이켜 봐야했다. 결국 소개팅에 가서도 내 멋대로 하겠다는 건, 변화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답할 말이 없네요, 졌습니다. 행님, 근데요. 행님도 소개팅 엄청 많이 하지 않았어요? 그때마다 유머러스한 모습 보여주고, 행님 진짜 모습 잘 안 드러내고, 성격 숨기고, 무거운 얘기 안 하고, 무조건 먼저 연락하면서 관심 보이고, 에프터 신청 하고, 마음에 안 들어도 세 번 이상 만나고 그랬습니까. A 형은 이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못했지. 그러니까 소개를 그렇게 많이 받아도 다 안 되었다이가. 한 번에 네 명이나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손잡고 포옹까지 했는데 까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나 많이 받았는데 다 안 되어서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오랜 기간 만나고 있는 지금 여자친구를 만난 건 소개가 아닌 모임에서였다. 내도 못했으니까 니한테 말해주는 거지. 내처럼 하지 말라고. A 형의 대답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행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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