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괜찮아야 하는 우리에게
항상 생활비가 빠듯한 대학생인 나는 4-1학기를 다니면서 근처 학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며 용돈 벌이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3명을 가르치며 내가 생각한 고등학생 이미지와는 다르게 너무 순수하고 예의바른 아이들에게 소소한 기쁨을 얻으며 만족스럽게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달 전쯤, 다른 반이었던 학생이 우리 반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바로 첫 수업 때, 그 학생은 질문이 있다며 오더니 몸을 가까이 밀착했다. 기분 탓이겠지 생각하며 살짝 거리를 두려고 하는 순간,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 자기 집으로 놀러가자며 친근하게 굴던 이웃집 남자 대학생이 놀러가고 싶지 않다는 내 말에 엉덩이를 만지고, 머리를 때렸던 일이 있다. 머리를 맞은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집으로 달려 도망쳤다. 나는 이 일을 심심치 않게 친한 친구들에게 말했고, 트라우마라던가 어떤 외상의 흔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언가 이상했다. 부모님은 쉬쉬했다. 나에게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으며, 내 기분이라던가 상태를 물어보신 기억이 전혀 없다. 그저 들었던 말은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그저 시간이 흘렀고, 나는 남자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에 한해 경계심을 가졌던 것 같다. 나에게는 7살 터울이 나는 귀여운 남동생이 있었고, 거의 키우다시피 한 그 애를 정말이지 사랑했으며, 어릴 때는 종종 그 애를 위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동생은 나에게 모성애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알려준 존재였다. 이제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더 이상 '아기'라는 호칭에 괴리가 있지만, 여전히 나는 동생에게 가끔 '애기야 밥먹어'라고 말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내 동생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어린 느낌을 계속 줄 것 같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경계를 풀었기 때문일까, 분명히 그 학생이 내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을 알고도 계속 '스친 걸까? 스친 거야'로 생각이 흘러갔다. 다 큰 내가 그 당시의 어린 나에게 그랬듯이 다 교훈이 있다며 합리화를 하였고, 부모님께서 나에게 그랬듯이 없던 일처럼 묻어두었다. 내가 이 일을 얘기한 세 명의 친구 중 첫 번째 친구는 말하고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고, 두 번째 친구는 혹시 모르니 걔가 반을 옮기기 전 선생님에게 연락해 걔에 대해 물어보라고 했고, 세 번째 친구는 그 일을 말해봤자 원장은 니 편이 아닌 돈을 내는 아이의 편이며 너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세 번째 말이었다.
친구의 탓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며 책임이다. 내가 그 일을 들추어 그 애가 나의 엉덩이를 만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묻어 두었을 것이다. 그 후 나는 또다시 다 잊었다고 생각했고, 그냥 다시 그 애를 태연하게 밝게 친절하게 가르쳤다. 내가 지금 의문을 가지는 것은 왜 그 일에 맞서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전혀 그 애에게 기분 나쁨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약간의 화를 내거나, 조금이라도 미워하거나, 정말, 정말 살짝이라도 눈을 흘기며 언짢은 마음을 내보이지 못했다는 것.
나는 그게 정말로 힘들었다. 내 권리를 침해당해도 아무말 못하고 웃는 사람. 정말 바보같고 멍청하고 답답하고 한심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는 사람. 나는 화를 내지 못했다. 야, 화 못내서 죽고 싶으면 죽을 용기로 화 좀 내. 수십 번 되뇌었고, 공감도 하고 인정도 했지만 행동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그 학생은 두 번이나 더 나를 만졌다. 앉아 있으면 등을 만졌고, 시시때때로 질문이 있다며 제지하기도 전에 나에게 가까이 오기 일쑤였다. 그리고 세 번째 그 애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나는 우습게도 화가 난 게 아니라 체념을 하게 되었다. 정말 정말 정말 우스운 일이다.
나는 병신이었고, 천치였다. 이건 아버지가 내가 어릴 때 수시로 하던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싫어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한번도 반항하지 않고 말대꾸 한 번 하지 못하는 엄마가 불쌍했지만 나중에는 답답함에 밉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모습은 또다른 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학원에 출근하면서 분노가 솟았고, 어떤 고민 회로를 거치지 않고 원장님께 얘기를 꺼냈다. 반전은 이제부터 펼쳐진다.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게 좀 민감한 문제에요. oo이가 ..."
"왜요? oo이 이상해요?"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불안한 눈빛으로, 곤란한 눈빛으로 말하는 원장님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다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세 번이나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전에 걔가 두 명의 선생님에게 그런 행동을 한 전적이 있으며 심지어 한 명의 여학생에게도 스킨십을 시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남자학생으로만 구성된 내 반에 걔를 넣으면서 나에게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더군다나 그 애에게도, 그 애의 부모님에게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저 '이제는 안 그럴 줄 알았지 뭐'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원장님이나, 그 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쏟아지는 화를 억누르며 나에게 쏟아지는 자책 때문이었다. 왜 진작 말하지 못했지. 왜 나는 용기가 없었지.
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원장님은 '세 번이나 일어날 동안 왜 말을 안 하셨어요?' 물었다.
놀랍게도, 나는 허탈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다 파악하기에는 통감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그렇게 변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원장님은 따로 얘와 얘기를 하고, 나에게 사과를 하라고 시켰다. 이 아이의 죄송합니다, 에는 어떤 죄송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00아 그런 행동 정말 나쁜 거야. 따위의 유치원생에게나 할 법한 말들을 늘어놓다가,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 이런 얘기를 하는 나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 청소년이라 벌도 가벼울 것인데다가 학원에서 절대로 이걸 들춰내지 못할 것을 다 알고 있는 그 애의 얼굴을 보았다.
한탄스럽게도 나는 내내 생각한 말들을 버리고, 염소같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00아. 쌤도 남동생이 있어. 지금 너를 정말 내 친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야. 제발 더 이상 그 나쁜 행동이 너의 습관이 되지 않게 해야 해."
무표정한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 애는 고개를 끄덕, 했다.
그 후 원장님은 나에게 그 애의 수업을 "일단" 중간고사 때까지는 마무리하라고 했다. 그게 어른의 도리이며, 책임감이라고 했다. 더 이상은 나의 믿음의 문제라고 했다.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원장님의 말들에 휩쓸린 듯이, 그저 '이렇게 오랜 시간 대형학원을 운영하려면 저 정도 멘탈과 말빨이 있어야 하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나는 매일 하던 기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미웠고, 하나님이 미웠다. 내가 죽을 용기가 없다는 것이 원망스러웠고, 고작 이까짓 거에 자살 충동이 든다는 사실, 이렇게 강하게 든다는 것이 한심했다.
내가 더러운 기분이라 샤워를 했다. 소독을 시키듯이 몸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나는 크게 울었다. 그러는 동안, 우는 나를 막고 억압하는 내가 있었다. 누군가는 울려고 하고, 누군가는 울지 말라고 싸워댔다.
하나님은 내가 화났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냥 제발 울어라, 하셨다. 나는 어이없었다. 나는 이런 거에 화내는 사람이 아닌데. 쉽게 분노하고, 화내는 아버지처럼, 걸핏하면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처럼 화내는 사람이 아닌데, 했다. 나에게 '분노, 화냄'은 악이었다. 진정한 악은 따로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내가 전혀 계획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솔직히 나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입장이었고, 하나님께서 어르고 달래며 내 손을 붙잡고 포기하지 않으셨다. 나는 무서웠다. 이 일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나는 하나님의 말을 무시하고 두 번의 수업을 강행했다. 그러는 동안 그 애는 다른 아이들과 잡담하고, 또다시 조용히 하라고 시키면 아~~~~피곤해요~~~머리 아파요~~~~~졸려요~~~를 시전하는 그 친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 애가 정말 깊이 반성한 거 같다며 충격받았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던 원장님이 나에게 "쟤 진짜 뻔뻔스럽다.."라고 두 번 세 번이나 말할 정도였다. 나는 그저 "그러게요" 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두 번의 수업을 끝내고 오늘이 되었다. 내일 그 일이 있고나서 세 번째 수업을 나가야 했다.
-다음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