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늘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
돈 없고 시간 없는 고시생인 나에게 그는 과분한 사람이다.
멋진 직장에, 주위 사람에게 후한 인심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어딜 가나 리더 역할을 하는 그 사람은 모자람이 없어보인다.
뿐만 아니라, 성격도 다정한 편으로 태생이 느긋해서 온유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 사람과 연애를, 사랑을 하는 것은 퍽 즐겁지 않겠는가
심지어 나는 그를 몰래 흠모하기도 했었다.
그와의 연애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가고, 나는 아무리 맛있는 밥을 먹어도 멋진 곳에 가도
그와 어떤 감정도 공유할 수가 없다.
사랑을 맛보고, 만지고, 음미할 수가 없다.
아무리 사랑에 대해 물어도,
그는 자기를 취조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어떨 때 사랑을 느껴?
라는 나의 질문들에 네가 그렇게나 거북한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닐지 잘 생각해봐.
네 안에 사랑이 없어서는 아닐지 잘 생각해봐.
애초에 그대가 자신 말고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지 잘 생각해봐.
너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들, 나는 이렇게 글로만 대나무숲에 외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치듯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런데 너는 나를 만나러 먼 길을 오고,
맛있는 밥을 사주고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에서 나는 사랑의 흔적은 발견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랑 그 자체는 찾아볼 수 없다.
먹어도 먹어도 허한 것처럼,
사랑을 해도 해도 내 마음은 외롭다.
사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려고 노력해봐,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들 이렇게 연애하는 걸까?
연인,이라는 칭호를 서로에게 갖다붙이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얘기하지 않고
함께 알아가보지 않고, 서로를 만질 때 사랑이 아니라 욕정만을 느끼는가?
그냥 어떤 시공간을 일부를 공유하면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풍경을 보아도 서로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는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꿈을 꾼다
어디에 있던지 서로가 있음으로 더없이 벅차고, 서로의 마음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 사람의 존재를 음미해나가며 매일 새롭고 소중한 너를 알아가는 하루를,
내가 꿈꾸는 사랑. 내가 원하는 연애는 이런 것이다.
너라는 우주를 유영하는 비행사같은 연애.
얼마 전에는 '결혼이야기'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처음 개봉했을 때 보았던 것과 확연히 달라졌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커리어를 희생하고 고향을 떠나 그를 빛나게 해주며 살았던 모든 세월. 그 모든 것을 당연히 받으면서도 여자가 자신보다 잘나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남편. 어쩜 이렇게 공감이 갈까. 나는 결코 그 아내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되고 싶지 않다.
결혼적령기가 된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결혼에 대해 말하는데, 그에게 말하진 않지만 그와의 결혼 생활을 나 역시 매우 꿈꾸었다. 공부를 하면서 내 목표는 어느새 나의 커리어가 아니라 그와의 안정적인 결혼 생활, 그를 이루고 있는 관계들 속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것이 되었다. 그의 부모님, 친구들, 친척들, 직장 동료들에게 비추이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느새 나는 영화 속 부인처럼 남편을 빛나게 하는 아내가 되고자 하였다.
추석에 고향집을 다녀온 그는, 다들 얼른 결혼하라고 했다며 은근한 부담을 주었다. 예전에는 시험 때문에 서둘러 결혼을 못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이제는 시험이라는 방패막이 고마웠다. 나는 그와의 결혼에 대해 확신이 없다. 더이상 그대와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즐겁게, 행복하게 우리의 일상을 채워갈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대는, 나에게 확신을 가지는 결혼은 없다고 말하지만, 늦기 전에 너를 놓아주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차라리 그대가 떠나도록 해야 하는 건지. 너는 너와 잘 맞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누군가를 만나서, 네가 그토록 이상히 여기는 뜬구름 잡는 소릴 해대는 나같은 이상주의자 말고, 사랑에 대해 물으며 너를 귀찮게 하는 사람 말고, 궁금해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그저 밥이 맛있다든지 전혀 생각할 거리가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 남들이 인정하는 루트대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사회의 한 구성원을 잘 편입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인생을 살아라.
우린 잘 안 맞는다. 그래 성격 차이. 따분한 성격 차이. 고작 그런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참, 2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