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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 Oct 04. 2022

기념일마다 서운한 병

600일에

변했잖아. 편지 하나 바라는 마음까지 초라하게 만들어. 너한테 난, 사랑을 구걸하는 것 같아.. 혼자 서운해하지 말고 말하라고? 매일 이렇게 말해야 돼? 그래도 우리 둘만의 날인데. 편지 한장 서로 주고받자는 거. 카톡하나 다정하게 보내달라는 거. 기본적인 거 아니야? 그래, 말할 수 있지 이렇게 엎드려 절받으면서 억지로 못이겨 하는 네 모습 볼 수 있지. 근데 그럴 거면 안 받는 게 나아. 진심이 아닌 마음을 받으면서 억지로 기쁨을 만들어가며 비참해지느니. 솔직한 무관심을 직면하는게 마음 편해.


 너는 매일 나에게 "이해'를 해달라고 하지만, 내가 대체 얼마나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네 마음을 이해하겠어. 편지 한장 쓰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해 달라는 거야? 사귀기 시작할 때는 매 데이트마다 편지를 가지고 왔잖아. 너의 마음이 넘쳐흐른다는 듯이 담아왔잖아. 이제 메말라서 나올 것도 없는 마음을 쥐어짜내는 너를 볼 때마다 나는 너를 고문하는 것만 같아. 그런데 대체 무엇을 이해해야 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 네가 원하는 이해가 대체 뭐야? 서운해서, 속상해서, 슬퍼서 미치겠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눌러서 너에게 애교섞인 말투로 부탁을 해. 더럽고 치사하지만 우리 관계에 물을 주기 위해서 매일 나는 너에게 죄인이 된 것처럼 사정을 해. 제발 사랑하면서 살자고. 제발 표현하면서 가자고. 너는 내 얘기가 싫고 지루하고 징징거리는 아이같다고 생각하잖아. 네 눈빛이 너의 모든 세포가 내 이야기가 듣기 싫다고 말하는데, 더이상 뭘 어떻게 무슨 이해를 원해? 나는 정말로 궁금해. 정말 궁금해.. 


우리의 만남에 대체 너에겐 뭘 의미하는지.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랑은 아니라는 것뿐이야.

네가 가진 마음이 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 이외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체 그게 뭔지 난 모르겠어. 네가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나도 사랑해. 왜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말해? 내 방식대로 사랑하고 있어. 밥을 사고 너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잖아.' 

그래, 그런 것들을 받으면서 편지를 써달라고 하는 마음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거겠지?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600일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숫자와 아무것도 아닌 날에, 그냥 유치한 의미부여를 하면서 기쁨을 찾고 싶었어. 그냥, 종이에 적은 글자들로 우리 사랑을 한번 더 음미하고 싶었어. 그래. 없는 것을 보려고 하니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니깐 안되는 게 당연한 거겠지. 눈가리고 아웅하는 나를 볼 때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자조한다. 나에게 우리 기념일들은, 그런 날이야.

 

사랑 정말 어렵고 힘들다. 이제는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겠어. 사랑보다는, 내 멍청함. 나약함. 한심함. 외로움에 지고마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나 그 자체겠지

너는 나에게 왜 이렇게 화가 나있어? 하지만,

나는 우리의 끝을 막으려고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래. 평온한 너와 달리, 끝없이 내 안의 의심들과 사납게 싸우면서, 아니라고 우리 사랑은 아직 존재한다고 우기고 있어서 그래. 

점점 지쳐가. 네가 말하는 이해, 이해.. 너는 참 쉽겠다. 나는 다양한 말들로, 어떻게든 순화하고 포장해서 네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자기를 닦달하지 않고 스트레스 받게 하지 않고 바쁘고 피곤한 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을 내보이면서, 나의 욕심임을 부각하면서, 내 말을 들어주는 너에게 중간중간 감사를 표현하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해. 징징거리거나 조금이라도 화가 들어가거나 가르치려 들거나 평가하는 듯한 모습이 섞이는 순간 너는 매섭게 돌변하니까. 그러고도 겨우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그게 어려워'지만, 나는 그것마저 이해하면서, '그렇지? 어렵지.. 그래도 들어줘서 고마워' 라고 반응해야지만 너는 이 대화에 겨우 발을 걸치지. 


내 생일 오기 전에는 너와 작별할 거야. 얼마나 나한테 큰 실망과 상처를 줄지 상상할 수도 없으니까. 너는 분명히 소홀할 거고, 부담스러워 할 거고, 그저 축하하는 마음 하나 원하는 나와 달리, 인색한 너의 마음을 포장하려 들 거고, 무엇을 바라냐며 화를 낼 거고, 우리는 엉망진창이 될 거야. 너와 연애하고 나서 보내는 내 생일이 가장 슬픈 날이 되어버려. 너는 그런 남자야. 스스로 대단하다고 마지 않는 사람아, 너는 옆에 있는 사람을 메마르고 시들게 하는 사람이야. 좀 .. 알았으면 좋겠어. 그래 내가 결코 말하지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 알겠어? 너를 형용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들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그런 네가 재수없고 짜증나면서도 사실은 그런 모습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 어쩌면 그런 모습 때문에 너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건 내가 가지지 못했고, 못하고 있는 모습이거든.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나는 나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할 수 없는데, 저렇게 칭찬하고 귀히 여길 수 없는데, 매일같이 채찍질만 하는데. 어쩌다 뿌듯한 순간이 와도 별 거 아니야 우쭐대지 마 찬 물 끼얹고 마는데. 억지로 노력해서 잘했어 칭찬해도 평생 칭찬 한번 못해본 아버지가 딸에게 그러하듯 어색해버리고 마라. 자연스럽게 사랑받는 옆집 애를 부러워하듯이 너의 곁에 있길 원하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오늘도 나는 너와 작별해. 끝내지 못하는 멍청한 나. 바보같은 나. 가끔은 너를 떠나지 못하는 나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는 내가 미워. 내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얼마든지 너를 떠났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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