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 9
준호의 편지 5
수진아,
원고를 세 번이나 읽었다는 네 말에, 나는 오늘 아침에 그 원고를 꺼내 다시 읽어봤어. 네가 읽은 그 종이를 내가 다시 읽는다는 게, 어쩐지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네가 내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했지. 청년부 시절의, 조금 낮고 서두르지 않던 목소리. 나는 그 말을 읽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내 목소리를 50년 동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게 너라는 게.
수진아, 고맙다. 나는 그동안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가 기억한다니. 그 말 한마디에 50년이 그냥 무너지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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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은 거울 앞에 서는 일과 같다. 꾸밀 수도, 외면할 수도 없이 그냥 거기 있어야 한다. "
네가 그 문장을 꺼내줘서 고맙다. 그 글을 쓸 때 나는 정말 거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아내가 떠나고 나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거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이 너무 낯설더라. 누군가를 위해 웃을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위해 말을 걸 필요도 없는 삶이 시작된다는 게, 그때 처음 실감 났어.
그런데 네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 문장을 떠올렸다니. 피아노도 거울과 같다고 한 말, 나는 그 말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아. 손이 기억하는 것, 몸이 기억하는 것, 감정이 기억하는 것. 그러니까 네가 청년부 시절 그 멜로디를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지.
우리는 잊은 줄 알았는데,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함께 악보를 넘기던 손가락, 나란히 앉아 같은 박자를 맞추던 그 호흡. 그게 50년 동안 우리 몸 어딘가에 살아 있었나 봐.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갑자기 그때 그 예배당 벤치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어. 네 옆에. 기타를 튕기며 네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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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딸 이야기, 다시 읽었어.
전화가 뜸해졌다고 해서, 나는 마음이 많이 아팠어. 내가 부러웠다는 네 고백도. 그런데 수진아, 나는 네가 먼저 전화하지 않은 게 잘했다고 생각해. 재촉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니까. 기다리는 게 맞아. 아이가 자기 속도로 돌아올 때까지.
다만 네가 말한 것, 엄마가 괜찮은 척만 한 게 오히려 아이를 멀게 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 그 생각은 나도 해본 적 있어. 나도 아이들에게 늘 괜찮은 아버지였으니까. 걱정 끼치지 않는, 잘 견디는, 혼자서도 충분한. 그런데 그게 우리 아이들과의 벽이 되기도 했지.
요즘은 조금 달라졌어. 둘째와 통화할 때 가끔 솔직해지려고 해. 외롭다고, 네 생각이 난다고. 그러면 둘째는 항상 말해. "아버지, 그 마음을 숨기지 마세요. 우리가 아버지의 가족이잖아요."
어쩌면 네 딸도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몰라. 엄마가 괜찮은 엄마 말고, 외로운 사람으로, 설레는 사람으로, 때로는 불안한 사람으로 있는 모습을. 진짜 엄마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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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가벼워져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무게가 생긴다.
네가 한 그 말, 나는 가슴에 오래 담아둘 거야. 그 무게가 뿌리내리는 것 같다고, 단단해지는 것 같다고 한 것도. 그리고 '수진아' 하고 부를 때마다 내가 여기 있구나 깨닫는다는 그 말.
수진아, 나도 그래.
네 편지가 올 때마다 나는 거울 앞에 선다. 내가 누군지, 어디쯤 와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네가 부르는 '준호 오빠'라는 그 한마디가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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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만나자고 했지?
미안 ^^, 나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제 우리가 함께 다녔던 교회에 갔었어.
청년부 시절, 우리는 주일이면 그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지. 네가 피아노를 치고, 내가 기타를 치고, 우리 뒤에서 성가대가 화음 맞추던 그 자리. 50년 만에 다시 그 문을 열고 들어섰어.
그런데 수진아, 이상한 일이야. 건물은 새로 개축을 해서 예전 그때와는 많이 달라 보였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그대로였어. 오래된 나무 벤치의 냄새, 촛불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 향. 그 냄새가 온몸을 감싸는 순간, 시간이 통째로 거꾸로 흘렀어.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눈을 감으니까 네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어. 슈베르트, 쇼팽, 그리고 우리가 함께 연습하던 그 성가들. 악보를 넘길 때 스치던 네 손가락의 온도. 내가 기타 코드를 잘못 잡으면 네가 낮게 웃던 그 소리.
의자에 앉아 있었어. 네가 늘 앉던 자리, 내가 늘 앉던 자리. 지금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겠지만, 그날 오후에는 아무도 없었어. 나 혼자였어. 나는 네 자리에 앉아봤다가, 내 자리에 앉아봤다가. 그렇게 한참을 왔다 갔다 했어.
몇 달 후, 봄이 오면. 네가 피아노 치던 그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을까. 네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까. 네 눈빛을 마주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 너무 설레기도 하고.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편지 한 번 더 주고받자. 봄이 오기 전에, 우리 조금 더 가까워지자. 그렇게 천천히, 봄을 맞자.
수진아, 건강해.
2024년 따뜻한 겨울밤
준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