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 11
준호의 편지6
수진아,
새해가 밝았다.
며칠 전 네 크리스마스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바로 답장을 쓰려고 했어. 그런데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지. 새해가 되면 보내야겠다고, 새해 인사와 함께 보내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런데 수진아,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성탄 예배에서 네가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나를 생각했다는 그 대목을, 교회 마당에서 은빛 나무를 보았다는 그 대목을,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다르게 뛰더라.
새해 첫날, 나는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어. 그리고 깨달았지. 지난 한 해는, 50년 만에 네가 내 삶으로 돌아온 해였다는 것을. 그게 내겐 얼마나 큰 일인지, 새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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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진아, 새해가 되고 나니 내가 좀 달라진 것 같아.
겨울 내내 네 편지를 기다리고, 네 생각에 밤을 지새우고, 교회에 혼자 다녀오고 그랬잖아. 그때의 나는 왠지 움츠러들고 조심스럽기만 했어. 이게 꿈인가 싶고, 언제 깰지 몰라 불안하기도 하고.
그런데 새해가 되니까 마음이 좀 단단해졌어. 아니, 씩씩해졌달까.
어제는 오랜만에 등산을 다녀왔어. 혼자서. 겨울 산은 조용하고 차가웠지만, 오르는 내내 네 생각을 했어. 정상에 올랐을 때, 내려다보는 풍경이 왜 그리 시원한지. 나는 거기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며 생각했어. '수진아, 나 여기 있어. 잘 지내고 있어.'
작년 겨울의 나는 혼자 등산을 가면서도 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달랐어. 네가 없는데도 네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평화로움이 있었어. 아마도 봄에 만날 거라는 확신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 건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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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물었던 것들, 나는 그 질문들을 새해 내내 곱씹었어.
우리가 처음 말을 섞은 날, 네가 내 눈에 어떻게 보였냐고?
수진아, 나는 그날 네가 입고 있던 옷도 기억하지 못하고, 네 머리 모양도 기억하지 못해. 그런데 네 눈동자는 기억해. 어둡고 깊은 밤색이었는데, 그 안에 작은 불빛이 들어 있었어. 나는 그 불빛에 끌렸고, 그 뒤로 50년 동안 그 불빛을 잊지 못했어.
네가 피아노를 칠 때, 나는 연주보다 너를 더 많이 봤어. 네가 악보를 볼 때 살짝 기울이는 고개, 네 손가락이 건반을 누를 때 손목의 각도, 네가 힘든 구간을 지나고 나서 슬쩍 내쉬는 숨. 나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어. 네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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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수진아, 나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나 봐. 네가 피아노를 제대로 못 쳤다는 그 봄, 나는 글을 제대로 못 썼어. 원고지 앞에 앉으면 네 얼굴이 떠올라서,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하루가 지나곤 했지.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어. 그런데 그해 가을, 나는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기 시작했어. 너를 잊는 방법으로. 그런데 수진아,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와 살면서도 가끔 네 이름 석 자는 떠올랐으니까.
네가 내 원고에서 인용한 그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쓸 때도 네 생각이 났어.
"겨울은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선명한 계절이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비로소 나무의 진짜 모양이 보인다."
우리에게서 그동안 떨어져 나간 것들이 뭘까. 젊음, 욕심, 체면, 그리고 가족들의 반대. 그 모든 것들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이제야 우리의 진짜 모양이 보이는 것 같아. 늦었지만, 그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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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딸이 전화했다는 이야기, 나도 가슴이 뭉클했어.
밥 먹었냐는 그 한마디에 네가 오래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는 그 장면. 수진아, 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우리 아들을 떠올렸어. 미국에 있는 아들이 연말에 전화를 했는데(요즘 전화가 잦아 ^^), 통화 끝에 "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그분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하더라.
나는 전화를 끊고 한참을 웃었어. 아들은 내가 누구와 편지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분께도 안부를 전해주세요"라고 말한 거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었어. 아들은 나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나를 응원하려고 하고 있다는 걸.
네 딸도 그럴 거야.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결국은 엄마의 행복을 바라게 될 거야. 우리는 기다리면 돼. 50년도 기다렸는데, 새해에도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뭐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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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만나기로 했지.
새해가 되니 봄이 멀지 않았어. 아직 날은 춥지만, 그래도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 해가 지는 시간이 5시를 넘기 시작했어. 그걸 보면서 나는 봄을 세고 있어. 우리가 만날 날을.
어디서 만날지, 나는 벌써 몇 군데 떠올려놨어. 조용하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고, 커피가 맛있는 곳. 네가 피아노 얘기를 할 수 있고, 내가 글 얘기를 할 수 있는 곳. 네가 웃으면 그 웃음소리가 메아리치지 않을 만큼만 조용한 곳.
그날이 오면, 나는 네게 묻고 싶어. 지난 50년, 가장 네다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가장 슬펐던 날은 언제였는지. 그리고 그 모든 날들 사이사이에, 내가 얼마나 자주 스쳐 지나갔는지.
그리고 나는 말할 거야. 나는 네가 스치지 않았다고. 네가 늘 머물렀다고.
그날이 오면, 나는 작년 겨울의 나와는 다를 거야. 더 단단하고, 더 씩씩하고, 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너를 만날 거야. 네가 내게 그렇게 해준 것처럼.
봄이 오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새해 복 많이 받아, 수진아.
2025년 새해 아침
준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