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 10
수진의 편지5
준호 오빠,
크리스마스예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밤사이 눈이 조금 쌓여 있었어요. 많지는 않아요. 지붕 위에, 화분 위에, 얇게. 그래도 흰 것은 흰 거라 골목이 환했어요. 나는 커피를 들고 한참을 그냥 서서 봤어요. 오빠도 이 아침을 보고 있을까 싶어서.
오빠가 그 교회에 갔다 왔다고 했지요.
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며칠을 자꾸 그 장면으로 돌아갔어요. 오빠가 내 자리에 앉아봤다가 오빠 자리에 앉아봤다가 했다는 그 대목에서, 나는 그만 웃어버렸어요. 68살 어른이 텅 빈 예배당에서 혼자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지던지. 그런데 그다음 순간에는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오빠가 거기 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는데. 그런데도 오빠는 내 자리에 앉아봤군요.
오래된 나무 벤치 냄새, 촛불 냄새. 나도 기억해요. 그 냄새는 정말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힘이 있어요. 나는 오빠 편지를 읽으면서, 내 몸도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읽는데 코끝이 이상해지는 거 있죠. 글자를 읽었는데 냄새가 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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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저도 오늘은 교회에 다녀왔어요.
크리스마스 예배거든요. 성탄 예배는 빠지지 않아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떠나고 나서도. 그 예배만큼은 자리를 지켰어요. 올해도 마찬가지로 갔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달랐어요.
찬양이 시작될 때, 오르간 전주가 흘렀어요. 단순한 멜로디인데, 공기가 그 소리로 가득 차는 순간이 있잖아요. 나는 그 순간에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눈을 감으니까 오빠가 보이는 거예요. 청년부 시절 오빠가, 기타를 안고 악보를 보던 그 모습이.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무릎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어요. 반주를 짚듯이.
옆에 앉은 집사님이 내 손을 한번 보고 웃었어요. 나는 얼른 손을 멈췄지만, 그 뒤로도 예배 내내 마음이 그쪽으로 가 있었어요.
예배 끝나고 나오는데, 성탄 트리가 입구에 있었어요. 하얀 불빛들이 깜박깜박하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나는 그 풍경을 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50년 전 크리스마스에 오빠는 어디 있었을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크리스마스가 언제였는지, 나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요. 헤어지던 해의 성탄이었는지, 그 전 해였는지. 그런데 기억나는 게 있어요. 눈이 많이 왔었다는 것. 그리고 오빠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 두꺼운 것이었고, 오빠가 자꾸 올려 고쳐 매던 것. 왜 그 장면만 남아 있는지 모르겠어요.
오빠는 그 크리스마스 기억해요?
그리고 하나 더 물어볼게요. 오빠는 우리가 처음 이야기를 나눈 날 기억해요? 나는 기억하는데, 오빠 기억과 내 기억이 같은지 오래전부터 궁금했어요. 나는 오빠가 먼저 말을 걸었다고 기억하거든요. 악보 보면서 이 곡 어렵지 않냐고. 그런데 나는 어렵지 않다고 했고, 오빠가 잠깐 멈칫했어요. 내가 틀리게 기억하는 건지, 아니면 오빠가 다르게 기억하는 건지.
그때 오빠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어요? 나는 그게 늘 궁금했어요. 내가 피아노를 칠 때 오빠가 가끔 연주보다 나를 더 보는 것 같다는 걸 느꼈는데, 내가 혼자 그렇게 느낀 건지. 오빠한테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이 나이에야 가능하네요.
또 하나. 우리가 교회를 더 이상 같이 다니지 않게 됐을 때, 오빠는 그 뒤로 얼마나 걸렸어요, 잊는 데. 아니, 잊었다는 말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물을게요.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나는 그해 봄이 지날 때까지 피아노를 제대로 못 쳤거든요. 건반을 누르면 자꾸 오빠 기타 소리가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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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보내준 원고에서 이런 문장이 있었지요.
"겨울은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선명한 계절이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비로소 나무의 진짜 모양이 보인다."
오늘 교회 마당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그 문장이 생각났어요. 잎이 다 진 나무들이 트리 불빛을 받아서 은빛으로 서 있었어요. 참 이상하게 아름다웠어요. 없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우리가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많은 것이 떨어지고 나서, 이제야 서로의 진짜 모양이 보이는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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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뜸하던 딸이요.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그 말 한마디였는데 목소리가 조금 풀려 있었어요. 나도 메리 크리스마스, 했어요.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딸이 먼저 말했어요. "엄마, 밥은 먹었어?"
밥 먹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딸이 말했어요. "잘 챙겨 먹어. 알았지?"
그게 다였어요. 길지 않은 통화였어요. 그런데 끊고 나서 한참을 전화기를 쥐고 있었어요. 딸이 아직 뭔가를 풀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전화를 했다는 것. 크리스마스에 엄마 생각이 났다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빠 말이 맞았어요. 기다리는 게 맞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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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만나요, 오빠.
나는 이제 그 말을 쓰는 게 무섭지 않아요. 설레요. 어디가 좋을까요. 부담 없는 곳이면 어디든. 오빠가 골라줘요. 오빠가 아는 동네의, 오빠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곳으로요. 나는 따라갈게요.
오늘 밤 성탄 캐럴이 골목에서 들려요. 누가 틀어놓은 건지, 은은하게 들어와요. 나는 그 소리 들으면서 이 편지를 써요. 오빠도 어딘가에서 이 밤을 보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메리 크리스마스, 준호 오빠.
2024년 12월 성탄절 밤
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