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Independence)과 탈출(Escape)

강팀장, 스타트업 대표로 살아남기 (6)

by 알록

아내와 맺은 그 비장한 '1년의 계약' 이후, 나는 곧바로 사직서를 던지는 대신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어떤 이는 이를 '스텔스 창업'이라고도 한다. 재직하면서 창업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나도 낮에는 여전히 넥스트 데이터의 강 팀장으로서 밀려드는 유지보수 업무를 쳐냈고, 밤에는 MiriBook의 기초 설계를 다듬었다. 객기를 실력으로 바꾸기 위해선 '준비된 퇴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그사이 회사의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나쁜 방향으로 악화되어 갔다.


사무실의 공기는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그것은 열기가 아니라 과부하로 타들어 가는 기계의 탄내에 가까웠다. 박 대표가 야심 차게 영입했던 게임 기획자들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절반이 회사를 떠났다. "전통적인 SI 기업의 문화가 게임 개발의 창의성을 죽인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박 대표의 '돌격형' 지시가 그들의 전문성을 사사건건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떠난 자리를 메우는 방식이었다. 박 대표는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는 대신, 남은 SI 개발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김 차장, 이번에 나간 기획자들 기획안 있지? 그거 그냥 개발자들이 알아서 로직 짜서 넣어. 유니티 엔진 공부하라고 시간 줬잖아. 왜 자꾸 못한다고만 해?"


박 대표의 고함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단이 '악수'였음을 인정하는 대신, 조직원들의 '의지 부족'을 탓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넥스트 데이터를 지탱하던 실력 있는 시니어들이 하나둘씩 짐을 쌌다. 내가 아끼던 이 대리마저 야위어가는 얼굴로 내게 상담을 요청해왔다.


"팀장님, 저 어제 와이프랑 심하게 싸웠습니다. 애는 커가는데 매일 밤샘에, 월급은 동결이고... 우리가 지금 뭘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게임, 진짜 성공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에게 아무런 희망 고문을 할 수 없었다. 이미 박 대표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늘어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한 단기 대출 서류들이 쌓여가고 있었고, 기존 SI 고객사들로부터는 서비스 품질 저하에 대한 항의 공문이 빗발치고 있었다. 넥스트 데이터라는 거대한 배는 이미 엔진에 물이 들어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그 시간을 견디며 MiriBook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 주말마다 작은 출판사들을 몰래 찾아다니며 편집자들의 고충을 들었고, 독자 리뷰어들의 피드백 데이터가 출판사의 마케팅 비용을 얼마나 절감해줄 수 있을지 수치화했다. 아내는 밤마다 내 노트북 화면을 훔쳐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침마다 내 가방에 비타민제를 챙겨 넣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무언의 응원을 대신했다.


동물원의 사자는 사냥하는 법을 잊어도 굶어 죽지 않는다. 사육사가 때가 되면 고기를 던져주고, 비바람을 막아줄 튼튼한 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 팀장이라는 이름으로 누렸던 권위와 연봉, 그리고 동료들의 존중은 실은 동물원의 울타리가 주는 안락함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2월의 찬 바람이 불던 날, 나는 품속에 오래 품어온 사직서를 꺼냈다. 드디어 동물원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박 대표의 방은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한때 번뜩이던 그의 직감은 이제 독선과 피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사직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강 팀장, 당신까지 이러기야? 지금 회사가 어떤지 알잖아.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데."


박 대표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위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애걸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리더의 잘못된 결단에 끝까지 동조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 함께 침몰하는 것일 뿐이다.


"대표님, 6개월 전 제가 말씀드렸던 그 '객기'를 이제 실력으로 보여드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시스템은 이미 무너졌고, 대표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잃으셨습니다."


"나간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밖은 여기보다 더 지옥이야! 당장 내일부터 당신을 지켜줄 울타리가 사라진다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이제 동물원의 안전한 울타리가 없는 진정한 '야생'으로 걸어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급식도,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도 없다. 오직 스스로 사냥하지 못하면 굶어 죽어야 하는 냉혹한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잘못된 선택 하나에 생명이 위협받는 곳, 그것이 내가 선택한 독립의 본질이었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개인 짐을 챙기는데, 남아있는 팀원들의 시선이 등에 꽂혔다. 그것은 부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5년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사무실의 보안 카드를 반납하고 빌딩 밖으로 나오자,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겨울 공기가 밀려왔다.


회사를 나오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은아, 나 지금 나왔어."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아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생했어. 오늘 저녁은 당신 좋아하는 거 해놓을 테니까 일찍 와. 내일부터는 진짜 당신 실력 보여줘야 해. 야생으로 나갔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화를 끊고 나는 넥스트 데이터가 입주해 있는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유리 외벽 안은 여전히 평안해 보였지만, 나는 이제 그 동물원 밖에 서있다. 사육사가 주는 고기 대신 직접 먹이를 찾아야 하고, 적의 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6개월간의 신중한 준비, 아내와의 약속, 그리고 무너져가는 조직을 지켜보며 다진 결의.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내 인생을 되찾기 위한 첫 번째 독립 선언이었다. 객기를 실력으로 치환하는 365일, 그 첫 번째 날의 해가 저물고 있었다. 뒤로는 동물원의 문이 닫혔고, 눈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거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경영 수업 제6강] 신중한 독립(Independence) vs 무계획적 탈출(Escape)

퇴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경영의 시작입니다. 감정에 휘말린 즉흥적인 퇴사는 '탈출'에 불과하지만, 시장을 분석하고 내실을 다진 뒤의 퇴사는 전략적인 '독립'이 됩니다.


ㅇ전략적 독립: 조직의 위기를 관찰하며 자신의 창업 아이템을 검증하고, 이해관계자(가족, 회사 등)와 합의된 타임라인을 가진 상태에서의 퇴사.

ㅇ무계획적 탈출: 상사와의 불화나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대안 없이 던지는 사직서. 대개 '객기'로 끝날 확률이 높다.


불확실한 희망보다 명확한 위험이 옳은 판단을 돕기도 합니다. 준비된 리더는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릴 때 이미 구명정을 완성해 둡니다. 강 팀장의 6개월은 단순히 시간을 끄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용기를 실력으로 증명하기 위한 '자금'과 '논리'를 확보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창업을 준비한다면 지나칠만큼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자기성찰 포인트 (강 팀장의 관점): 이제 울타리는 사라졌습니다. 넥스트 데이터의 '강 팀장'이라는 타이틀이 주던 보호막 없이, 오로지 MiriBook 서비스의 본질로만 승부해야 합니다. 박 대표를 비판하던 칼이, 이제 스스로를 겨누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퇴사는 불가피한 선택입니까, 준비된 수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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