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종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다.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들어줬고 고민도 곧잘 듣고 이해해주었다.
처음 시작은 아마도 아주아주 어릴 때 할머니가 나에게 인생 한탄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그덕에 정신연령이 높은, 그리고 또래답지 않은 어른스럽고 우울한 아이가 되어서 자랐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고민의 무게를 넘는, 정말 특수하고 상담을 요하는 정도의 큰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떻게 내 주위에 이런 사람들만 있지 싶을정도로’ 큰 우울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신기할정도로 내게 다가왔고 나에게 마음을 잘 터놓고 얘기했다.
내가 딱히 공감이나 위로 해결책을 잘 말해준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불행과 우울을 털어놓고 개운해져서 떠나는것 같았다.
지인들의 신뢰를 얻고,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나는 그걸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남은 나에겐 조금씩 우울이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이후에도 기쁠 때가 아닌 슬프고 부정적인 기분이 될 때 나를 찾았고 만성적인 부정적 이야기를 하고 다시 떠나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굉장히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아마 기본 성향에 이런 환경적인 요인이 더해진 탓이었겠지만 나도 이젠 내 우울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상담을 받아야할 정도였다.
나는 이후에 내가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감당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돈내고 전문가에게 상담 받는게 맞는거고
나는 나또한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기분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어찌보면 냉정한데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친하다고 해서 내 힘든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게 되었으며
가령 남들이 부정적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더이상 듣고 싶어하지도 이입하지도 않고 참여하지 않거나 방관하게 되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물리적인 행동이나 도움을 준다. 하지만 정서나 감정은 어쨌든 감정을 겪은 당사자가 수습하는게 맞다.
나만 힘들다고 남의 감정을 부정으로 물들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돈내고 상담하는건 예외. 그건 직업이니까)
주의할점은 나에게 이런 표현을 한 사람들은 한시적이 아니라 만성적인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갑자기 닥친 슬픔과 불행 특수한 경우엔 당연 공감과 위로를 한다.
하지만 삶이 너무 힘들고 지치고 고단하고 직장도 싫고 사람도 싫고 기분도 나쁘고 아프고 슬픈 징징거림엔 더이상 답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그런말을 하는 사람들은 늘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게 싫으면 본인이 상황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먼저하면 되는데 그건 싫고 매너리즘에 빠져서 부정적인 감정은 계속 말로 주변에 힘들다고 표현한다.
(이게 힘들다면 더이상 주위에 호소하기를 멈추고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해서 나와 깊게 대화하고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추천한다.)
혹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를 위해 더이상 들어주지 않아야 한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더 잘 들어주는 사람을 알아서 찾아내는 능력이 있으며 당신은 해결책이 아니다. 들어준다고 착한사람인 것도 아님.
차라리 근원 해결을 위해 좋은 상담을 알아봐주는게 도움이 된다.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더이상 소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