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 가족은 무너지고 있었다

- 모두가 집에 있었지만 아무도 안전하지 않았다

by 서니온

"어머님, ○○이가 또 온라인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서 연락드렸어요."


"아이고~선생님, 매번 죄송합니다. 여러 번 깨웠는데도 못 일어나네요. 다시 깨워보겠습니다."


코로나 시기,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건 바로 등교하지 않는 아들이었다.

밤낮이 뒤바뀌어 밥도 먹지 않고 새벽까지 온통 게임에 빠져 있었다.

담임선생님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을 깨우려 하면,

험상궂은 괴물로 변한 아이가 한바탕 막말을 퍼부어댔다.

아침 출근 전부터 천장이 떠나갈 듯 서로 고성이 오가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는 ADHD 상담 과정에서

품행장애 가능성까지 거론되었고,

학폭위가 논의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이후 고학년으로 접어들며 폭력적인 언행은 점차 누그러졌다.


중학교 입학 후에는 큰 탈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 불안한 소강상태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공포의 중2가 시작되자마자 난데없이 코로나가 터졌다.

집은 순식간에 지뢰밭이 되었다.


하필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기에 팬데믹이라니,

그것도 3년 넘게 지속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ADHD, 사춘기, 그리고 코로나까지,

세 가지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밖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직장에서는 상사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난 어느새 가장 만만한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참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애써 밝은 얼굴로 묵묵히 견뎌내 보았지만,

숨 죽여 조심해도 화살은 늘 내 쪽으로 날아왔다.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오래전 트라우마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혼 직전,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친구와 함께

용하다는 스님에게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친구에게는 좋은 말만 줄줄이 늘어놓던 그는

내 차례가 되자 굳은 표정으로 차마 믿기 힘든 말을 던졌다.


"얼마 안 있어 이혼하고, ○○살에 ○○암으로 죽어."


"네? 저희 엄마도 그때 ○○암으로 돌아가셨는데요.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요?"


애끓는 내 질문에 그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아, 차라리 오지 말 것을...


사방이 꽉 막혀버린 듯한 코로나 시기에

그 저주는 더 이상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가 한창일 때 친정아버님이 입원하셨다.

한쪽 다리가 퉁퉁 부어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팬데믹 속에서 병원 문턱은 높았고,

입원 절차 하나하나가 넘어야 할 벽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저녁,

시내 큰 병원까지 급하게 차를 몰았다.

빗속에서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은 아버님과 함께

방치되듯 하염없이 기다리다 겨우 코로나 검사를 받고

당일 입원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하지만 입원은 시작에 불과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검사들,

그 사이 급속도로 번진 구내염 때문에

아버님은 물 한 모금조차 드시지 못했다.

검사 결과는 신장염과 현미경 다발성 혈관염이라는

희귀성 자가면역질환이었다.

치료 도중 폐렴 합병증까지 겹쳤고,

섬망과 깊은 우울감으로

아버님은 급기야 병원 탈출을 감행하셨다.


그렇게 6개월 만에 퇴원했고,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셨다.

하지만 그 뒤에 기다리고 있던 건

치매라는 또 다른 청천벽력이었다.


신종 바이러스는 몸과 마음 곳곳에 스며들어

위태롭게 버텨오던

우리 가족의 삶을 무너뜨렸다.


모두가 집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