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힘날세상 Oct 14. 2023

15화 월하노인을 만나기는 했는데

기다려보라고

   

“아버지, 오는 토요일에 인사시킬 사람이 있어요. 괜찮으시죠?”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아니, 두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쿵쾅쿵쾅 뛰었다. 애써 눌러 참고 살다보면 이런 날은 오는 거였다. 하늘이 열리고 꽃빛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기쁨이었고, 제대로 된 행복이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앉고 흔들었다.

“여보, 왜 그래요? 또 가위눌렸어?”     

꿈이었다. 


빛을 잃은 어둠이 차지하고 있는 거실로 나왔다.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세상은 새벽을 마련하고 있다.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을 잃어버린 것 같다. 허전하고 허망하다. 웃음이 나온다. 헛웃음이다.     

 

아들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다. 입학 때 등록금만 내주었을 뿐, 과외를 하고, 학원 강사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국립대학이라서 학비는 쉽게 충당하였고, 생활비도 너끈할 정도로 벌었다. 군대에 가기 싫어했는데, 3학년이 끝났을 때 억지를 부려 입대시켰다. 대학원 진학이 무산되었다.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지도교수의 말에 스스로 돌아선 까닭이다. 출산을 앞둔 선배의 간곡한 부탁을 못 이기고 잠실에 있는 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를 하게 되었고, 다음 해에 복잡하고 어려움 채용시험을 거쳐 정식으로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나고 있다.      


여행의 문은 활짝 열렸다. 방학하는 날 나가서 개학 전날 돌아왔다. 세상은 넓고 시간은 많았다. 어느 때부터는 스쿠버에 몰입하였고, 마라톤의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었을 때,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 꼭꼭 닫혔을 때는 캠핑과 골프의 세계를 열어젖혔다. 때론 며칠씩 틀어박혀 책 읽기에 빠져 있기도 했다. 중식, 양식, 한식 요리를 섭렵하기도 해서 혼자 사는 부엌은 우리 집보다 그릇이 많았고, 온갖 요리기구가 넘쳐났다. 제 누나가 시집갈 때, 이바지 음식을 제 손으로 만들어 들려 보내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의 인생관은 늙은이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높이였다.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지는 화려함과 흥겨움을 만끽했고, 언제나 삶의 초점은 현재에 맞춰 있었다. 아들도 그렇게 서른여섯 해를 살고 있다.     

 

늙으면 꿈도 흐릿하게 꾼다. 꿈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도 뚜렷하지 않고, 스토리도 잘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네가 생각하고 있는 여자는 없다. 80%가 맞으면 20%를 채우며 사는 거고, 60%가 맞으면 40%를 채우며 사는 거야. 그런데 80% 맞는 사람보다 60% 맞는 사람과 살아야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거야.”

술은 참 좋은 것이다. 데면데면한 사이를 확 무너뜨리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술은 아들과 마주 앉아 이런 말도 할 수 있게 해주는 묘약이다. 


“알죠. 아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으니까 문제죠. 사실 그동안 만난 여자분들에게 딱지 많이 맞았어요. 제가 좋으면 그쪽이 싫고, 그쪽이 좋으면 제가 싫고. 어렵더라고요. 아버지한테도 채었다고 말하기는 싫더라고요. 그래서 싫다고 말했죠.”

“그랬구나. 내가 오해를 했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얼마 전 꿈에 월하노인을 만났다. 사람들의 배우자를 찾아 연을 맺어준다는 그 월하노인 말이다. 15년 전에 대만 여행 중 루캉(鹿港)이라는 항구도시에 있는 재신전財神殿에 모셔져 있던 바로 월하노인이었다. 하얀 수염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고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던 모습 그대로이다. 


“월하노인님, 너무하십니다. 제가 그때 루캉의 재신전에서 복전福錢까지 넣으면서 간절히 부탁을 드렸는데 다 잊으셨습니까? 정말 너무 하십니다.”

나는 뾰로통하게 월하노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월하노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얀 수염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당당한 위엄만 뿌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난 분명히 네 부탁을 들어줬다. 네가 내놓은 복전 100NTD를 잘 받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네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느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위를 안겨 줬지 않느냐 말이다.”

그렇기는 하다. 그때 아들 결혼은 부탁하지 않았나? 이거 어떡하지? 복전을 올리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 

“제 아내도 복전을 올렸는데요?”

아내가 복전을 올렸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단 우기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랬나? 어디 보자. 어! 맞네. 알았다. 내가 어떻게든 올해에는 네 아들 짝을 찾아보겠으니 기다려 봐라.”

“제 아들은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고, 온갖 요리도 다 잘할 뿐만 아니라, 저희는 아들이 결혼하면 남과 같이 살겠다고 선언한 몸입니다. 시월드라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도록 명절에는 우리가 해외로 나가려고 합니다. 아들의 성을 며느리의 성으로 바꾸라고 할 생각입니다. 이 정도면 시부모로 괜찮지 않나요? 은행의 협조가 조금 있었지만, 비를 맞지 않을 만한 제집도 있고…….”

나는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월하노인께서 어디론가 떠나갈 듯한 채비를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았다. 알았다구. 일단 기다려 봐라.”

월하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소개팅은 3초 만에 결판이 난다고 한다. 물론 첫인상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어떻게 3초 만에 결정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3초 만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소개팅은 안 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부족한 점을 채워가면서 세상 재밌게 살아갈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아이를 안 낳는다고 해도 혼자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아들을 받아줄, 아들이 받아줄 처자는 세상 어디에 있는 것일까. 월하노인은 약속을 지키기는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14화 지공선사地空禪師로 살아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