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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Nov 15. 2023

16화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마음까지 늙지는 말아야지

      

봄비가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 진초록의 옷을 입기 시작하는 숲길을 따라 걷는다. 우산을 쓸까 하다가 향긋한 비내음을 온새미로 받고 싶어 그냥 걷는다. 모자 차양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서 농익은 봄의 시간을 본다. 빗방울이 간지럽히는 숲길은 칸타빌레cantabile로 가느다랗게 이어진다.      


비에 젖는 숲은 고요하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한꺼번에 팔을 벌려 빗줄기를 끌어안는 까닭이다. 숲을 따라 이어지는 칸타빌레cantabile의 선율은 걸음을 빨리해도 아다지오adagio를 넘지 않는다. 그 느릿한 걸음의 사이마다 여리디 여린 음표가 발돋움한다. 새싹이다.     


숲은 옷을 바꿔 입어 계절을 맞는다. 칼날같이 예리하게 내리 꽂히는 햇볕을 맨몸으로 막아 펼쳐놓은 흐벅진 그늘을 다 떨구어 놓고 겨울을 발가벗은 나신裸身으로 걸어야만 화사한 봄옷을 입을 수 있다. 후려치는 칼바람에 온전히 맨살을 다 내놓고 꽁꽁 얼어붙고 난 후에도 소소리바람까지다 견디어 낸 후에야 담록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다 덜어내고 비워내지 않고서는 새 잎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나무이고 숲이다.    

  

퇴직한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타이를 하고 슈트를 입고 문을 나서려다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몸에 밴 습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마음이 무거웠다.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서 바쁘게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양손에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가는 아주머니의 걸음 끝에는 어떤 모양의 시간이 마주 설까. 숄더백을 오른 어깨에 메고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저 중년의 남자는 오늘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할까. 저 남자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무게는 저 가방으로 말할 수 있을까. 채 열 걸음을 한꺼번에 이어서 걷지 못하는 저 노인이 지나온 세월은 어디로 수렴하는 것일까.      


꺼내었던 구두를 신발장에 넣었다. 슈트를 벗어 옷장에 곱게 걸어두고, 타이를 풀어 제자리에 돌여 놓았다. 털썩 소파에 앉았다. 갈 곳 없는 늙은이가 된다. 할 일 없는 늙은이로 돌아간다. 조금 각을 세웠던 신경을 동그랗게 말아 넣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사고思考의 주머니도 납작하게 가라앉힌다.      


나무는 새잎을 피우기 위해 낙엽을 떨군다. 순전히 제 실속을 차리려는 필연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그 실속을 차리려는 마음으로 수북하게 떨구어 놓은 나뭇잎은 온 숲을 다 덮어 이불을 만든다. 그 이불 아래에서 곤충들은 겨울을 나고, 힘을 비축하여 새봄을 맞는다. 낙엽 더미의 온기를 품고 겨울의 한기를 견뎌 새싹은 돋아난다. 그 곤충 한 마리와 가늘게 돋아난 새싹은 숲을 이루는 힘으로 자라난다. 숲이 되어 길을 잇고, 새들을 불러 아름다운 선율을 내놓는다.     


비워서 채우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도 다를 게 없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것은 움켜쥔 손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닫아 놓은 것은 모두 다 열어야 한다. 꼭꼭 닫은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아무것도 비울 수 없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면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이기적인 자아를 집어내어 사정없이 버려야 한다.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는 일은 어려우면서도 쉽다.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퇴근하는 길에 노인들이 하루를 보내는 공원을 지나게 되었다. 팔각 정자 주변에서 바둑판을 벌이고 있었다. 대마의 생사가 궁금하여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오늘 처음 온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반말을 건넨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당황하여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았고, 어딘가 지적인 생김생김이었다.

“내가 반말로 했다고 기분 나빠할 것 없어. 여기에서는 모두 다 반말이야. 여기에 오려면 나부터 버려야 해. 내가 어떤 사람인 가는 중요하지 않아. 또,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도 알려고 하면 안 되지. 그냥 모두 다 하루를 같이 보내는 친구이고 동료인 거야.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거야.”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내가 그래도 한가락하고 살았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허접한 늙은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허접한 늙은이가 되지 않으면 적어도 그 공원에서 하루를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외눈박이가 사는 섬에서는 눈박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우는 것은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받아들일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기적인 나’를 버려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비우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다. 나의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공감할 수 있다.      


늙으면 입은 닫고 귀를 열어야 한다. 입을 닫지 못하면 ‘꼰대’가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십상이다. 세상의 모든 화禍는 입에서 시작한다. 그것도 고집만 세지는 노년의 입은 꼭 닫아야 한다. ‘늙으면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갑을 연다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입을 닫아야 한다. 내 입을 닫아야 상대방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심리학자 정혜신은 『당신이 옳다』에서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라고 했다. 자기의 감정이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비우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고 채우는 일이다.      


숲은 죽어서 겨울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말라붙어버린 나뭇가지에는 아린芽鱗, bud-scale이라고 불리는 겨울눈을 보호하고 있는 비늘 모양의 껍질이 있다. 아린은 혹독한 겨울의 막아서고 있다가 봄이 되어 새싹을 틔워놓고는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 숲은 다 버린 듯하지만 새로운 내일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아린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를 만드는 일 말이다. 좀 더 널찍하고 넉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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