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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Dec 18. 2023

17화 할아버지와 손자가 전쟁을 한다고?




넷플릭스에서 영화 ‘The War With Grandpa’를 보았다. 할아버지(로버트 드 니로)와 손자(옥스페글리)가 방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그린 코미디 영화이다.


혼자 사는 에드가 다리를 다치자 딸 샐리(우마 서먼)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신다. 자신이 직접 지은 추억이 깃든 집을 떠나기 싫어하던 에드는 딸의 강요에 집을 나서고 샐리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다.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준 12살 손자 피터는 다락방 신세가 되고 단단히 삐진다. 다락방에서 생쥐와 씨름하던 피터는 할아버지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늦은 밤 음악을 틀거나 레코드 플레이어를 고장 내는 등 장난 같은 전쟁으로 에드를 골탕 먹이는 피터. 에드 역시 가구에 나사를 빼버리거나 발표 자료를 바꿔 피터를 곤란하게 만든다. 서로의 물건에 각종 트랩을 설치하며 장난 같은 전쟁이 벌어지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재산이나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전쟁을 치르기로 규칙을 정한다.


급기야 피터는 커다란 뱀을 할아버지의 방에 풀어놓고 가볍던 두 사람의 전쟁이 점점 심해진다. 방을 사수하기 위한 두 사람의 전쟁으로 가족들이 받는 피해도 점점 커지기 시작하자 상처를 주는 전쟁을 그만하자는 에드의 제안에 둘은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단 한 번의 대결로 방을 차지하기로 결정한다.


에드의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들과 피터의 학교 친구들은 핑퐁 위에서 피구 대결을 펼친다. 모두가 아웃되고 에드와 피터가 마지막으로 남지만 대결은 결국 무승부로 끝난다.


에드는 피터를 이끌고 작은 나룻배에 오른다. 즐겁게 낚시하던 두 사람이 강에서의 낚시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쫓아오는 경비대를 피해 함께 도망친다. 에드는 자신이 직접 지은 집으로 피터를 안내하고 벽에 담긴 몇 가지 비밀을 고백한다. 비밀을 하나둘 공유하며 점차 가까워지는 두 사람.


하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에드는 친구의 장례식에서 피터의 장난으로 망신당한다. 피터가 에드의 장난으로 학교 선배에게 폭행당하자, 에드와 할아버지 친구들은 피터를 때린 선배를 찾아가 혼내준다.


두 사람은 막내 제니의 생일 파티를 위해 임시 휴전에 들어간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전쟁처럼 커지고, 전구를 수리하던 에드가 감전되어 날아가며 파티장은 난장판으로 변한다. 아수라장이 될 때 커다란 나무가 피터를 덮치고 에드가 뛰어가 구하지만, 부상을 당한 에드는 병원으로 실려간다.


혼자 사는 것을 좋아하던 에드가 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딸과도 트러블이 발생하고 에드는 물건을 챙겨 사라져 버린다. 되찾은 방보다 할아버지를 원했다는 것을 깨달은 피터는 에드가 직접 지은 예전 집으로 향한다. 에드에게 달려간 피터는 할아버지가 떠나길 바라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사과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에드 역시 피터와 함께하며 떠나보낸 아내에 대한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에드는 집으로 돌아와 달라는 피터를 껴안아 준다.


3개월 후. 수리된 집에서 전쟁 없이 살고 있는 가족들. 피터는 할아버지와의 낚시를 기대하고 있지만 에드는 다이앤과 함께 데이트를 나선다. 영화는 에드와 다이앤을 바라보는 피터의 전쟁 선포 눈빛으로 마무리된다.


큰 감동을 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에 무언가가 와닿는 영화이다. 영화는 늙은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단순구성을 이루고 있다. 시간의 흐름도 순행적이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도 없다. 또한 조금씩 한눈을 팔아도 될 정도로 사건 전개도 급하지 않다.


이 영화는 과장된 동작이나 분장으로 웃음을 짜내는 소극(farce 笑劇)이 아니다.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속에 인간의 결점이나 사회의 비리를 꼬집어 내어 웃음으로 분규를 해소하는 희극(comedy 喜劇)이다.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큰 웃음은 없어도 마음속에 은근한 즐거움이 돋아난다.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손주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할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물질적인 것을 많이 안겨주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손주들의 정신을 살찌우고, 정감을 돋아주며, 삶의 지혜를 심어주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도 차지 않는, 내가 꿈꾸고 있는 할아버지의 흉내만 내고 있는 것 같다.


삶이 영화같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디자인하고 꿈꾸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더구나 손주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면 할아버지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아이들이 보는 책을 읽어야 하고, 아이들이 즐기는 게임의 규칙 정도는 알아야 한다. 아이들과 같이 달릴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고, 아이들과 같은 순수한 마음도 남겨두어야 한다. 영화에 등장한 ‘에드’처럼 손자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에드’는 손자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다짐했을 때, 전쟁이 가져올 결과와 가족들이 겪을 불편함이나 피해에 대해서 예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규칙을 협상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딘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영화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 스스로 감독이 되어 몇 장면을 끼워 넣거나 빼내면서 다시 편집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 가면 되지 않겠는가.


 늙어가면서 시야가 가족으로만 좁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만큼 늙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발력도 많이 떨어졌고, 창의력도 살아 있지 않다. 내가 가진 힘이 부족한 만큼 시야도 좁아지는 것 같다. 이럴 때는 가족이 제일이다.


일곱 살짜리 손자와 손잡고 앉아 ‘The War With Grandpa’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늙은이같이 엉뚱한 생각을 잘하는 손자는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손자와 할아버지가 싸우고 대결하면서 혈육의 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일곱 살짜리 손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승부욕이 강한 손자는 분명 흥미를 느끼고 몰입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올 것이다. 그때 나도 로버트 드 니로같이 매정하게 전쟁을 벌여봐야겠다. 그것이 손자와 가까워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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