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산타할아버지 내년에는 안오셔도 될 것 같아요
- 할아버지, 지금 당장 저희 집으로 오실 수 있어요?
무섭게 얼어붙은 오후에 꽁꽁 싸매고 뒷산을 걷고 있는데 일곱 살짜리 손자가 전화를 했다. 눈에 덮인 저수지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을 한다.
- 우리 아가가 무슨 일로 할아비를 오라고 할까?
- 할아버지, 저 아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요. 그냥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 그래 알았다. 그런데 왜 오라고 하는 건데?
이 녀석이 뭔가 자랑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지난번 체스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밤에도 달려오라고 전화를 했었다. 자기가 받아온 금메달과 상장을 와서 보라는 것이다. 유치원 같은 반 여학생 둘에게 한꺼번에 러브레터를 받은 날에도 전화를 해서 불러댔었다.
- 할아버지, 제가요 편지를 두 장이나 받았어요. 이럴 때 '새옹지마'라고 하지요?
누나가 어린이 사자성어 책을 읽고 사용하는 사자성어를 어깨너머로 듣고 제멋대로 갖다 붙이는 거다. 이 녀석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펀인데, 시샘은 참 많다. 무엇이든 제 누나보다 많아야 하고, 먼저 해야 한다.
그래도 엉뚱한 상상력이 좋아 레고 놀이를 할 때는 대단한 모양을 만들어 놓는다. 스토리를 구성하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할아버지, 오셨습니까?
저녁 후에 딸네집으로 가서 현관을 들어서는데 손자가 달려와 넙죽 인사를 한다.
-그래, 오늘도 잘 놀았지?
-할아버지는 제가 놀고만 있는 줄 아세요? 저는 하루에 책을 두 권씩 꼭 읽고, 체스는 열 번씩 대결을 하거든요.
-오, 그렇구나. 그런데 오늘은 왜 오라고 했어?
-아, 그건 저희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서 산타할아버지께 편지를 써 놓았는데 누나가 자꾸 산타 할아버지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대답해 주세요.
그랬다. 초등학교 2학년인 손녀는 슬슬 의심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산타할아버지는 핀란드 산타마을에 살고 계시는데 거기에는 루돌프도 같이 살고 있단다.
-누나, 산타 할아버지가 핀란드에 산대잖아.
-그렇다면 그 먼 곳에서 어떻게 하룻밤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거냐고요. 혹시 엄마가 산타가 아닐까요?
-누나는 갑자기 엄마 타령이야.
-엄마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한테 어떤 선물 받고 싶냐고 물어보잖아.
-누나, 산타가 있다고 믿는 거야. 그래야 선물을 받을 수 있지
'이 녀석이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큰일 났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시간이 없다. 빨리 대처를 해야 한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런데 우리 손자는 산타할아버지께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할아버지가 한번 볼까.
-안 돼요. 산타할아버지만 볼 수 있거든요.
-응, 그렇겠구나. 얼른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선물을 확인해 봐야지.
-그런데 산타할아버지는 우리가 잘 때만 와서 선물을 몰래 주고 가는 거예요.
손자가 묻는데 손녀가 의심을 보탠다.
-엄마 아빠가 선물을 줄 때는 우리에게 직접 주는데요. 이상하잖아요?
-그거야 산타할아버지가 핀란드에서 오시니까 우리나라에는 밤늦게 도착하는 거지. 얼른 자러 가자.
괜히 늙은 할아비만 애가 탄다.
-저는 오늘 밤 안 자고 기다릴 거예요. 산타할아버지께 직접 받을 거예요.
아무래도 내년부터는 산타할아버지가 엄마라는 걸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어렸을 때 한 번도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어쩌다 명절 때 옷 한 벌 사주는 게 전부였다. 늘 배고픈 게 문제였던 까닭에 부모님들도 선물까지 주시기에는 여력이 없었을 것이긴 하다. 생일날에도 미역국이나 끓여주고 떡이나 한 시루 쪄주는 게 전부였다.
배부른 오늘날에는 케이크로는 부족해서 선물도 주고 용돈도 주어야 한다.
크리스마스가 아직도 열흘 넘게 남았는데 벌써 선물을 기다리고 있다. 제 엄마 아빠가 받고 싶은 신물은 준비해 줄 거고, 나는 책이나 사줘야겠다.
산타할아버지께서 특별히 초등학생이 되는 손자를 축하해 주려고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를 달아야지. 손녀에게는 동시와 동화를 잘 써서 그에 대한 선물이라고 편지도 써넣어야겠다. 어쩌면 올해로 산타놀음이 마지막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