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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Jan 02. 2024

19화 새해는 '값진년'이 되었으면 한다.

구영신 예배 드렸다. 신앙의 깊이라고는 접싯물보다도 못한데도, 그래서 남들로부터 지청구를 듣는 알량한 신앙인데도 송구영신 예배는 꼭 참석한다.


한 해를 돌아보며 뉘우치고 그러다가 마음을 쓰다듬기도 하고, 북받치면 슬쩍슬쩍 눈물을 흘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 송구영신 예배이다.

 

가는 해를 앞에 두고 앉았다.


카자흐스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눈이 맑은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여권을 잃어버렸다. 메고 있던 숄더백은 그대로 있는데 그 안에 깊숙이 넣어 놓았던 여권만 없어진 것이다. 일행들은 모두 떠나고 나는 혼자 남았다.  낯선 바람 속으로 나는 무작정 걸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걸었다. 홀로 걸어 마을을 벗어났다.  누우런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은 참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황량한 벌판에 다다랐을 때, 햇볕이 뜨거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한낮에, 혼자 서 있는 벌판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뒹굴고 있는 숄더백을 발견했다. 안에 여권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어  숄더백을 집으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심한 가위눌림에 발버둥을 쳤다.

 

10월인가, 단풍이 가을을 펼치고 있던 즈음에 온몸이 흥건히 젖을 만큼 발버둥을 친 후에 간신히 잠에서 깼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을 때, 창밖에는 어둠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그 후로 몇 차례 가위에 눌리면서 험한 마음으로 잠을 깼고, 어둠 속에 앉아 기도를 했다. 그렇게 가을을 보냈고, 보일러 온수관이 얼어붙는 차가운 세밑에 다다랐다.


가위눌림은 모든 것을 휘저어버렸다. 100 날 동안 자판을 두드려 도담도담 쌓았던 가느다란 문장들의 가닥가닥을 헝클어 버렸다. 뜨겁고 무서웠던 햇볕 아래서 맨몸으로 견뎌내고 있던 덜 익어 풋내 나는 글도 다 흩어 버렸다. 그 가위눌림은 무자비하게. 이어졌다.


- 가시밭길을 홀로 걸었습니까?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고립되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신 담금질입니다. 우리는 더 단단해져야 합니다. 힘듭니까? 디딤돌입니다. 고통스러웠나요? 움츠린 개구리가 멀리 뛰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광야에 서서 외치던 예수처럼 보였다.


불이 꺼졌고, 2023년이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카자흐스탄의 벌판도, 도담도담 자라던 문장들의 가닥들도, 덜 익어 풋내 나는 글들도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했고, 평안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이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31 절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다.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짓고. 낳은 새끼에게 혹독한 비행훈련을 시키는 독수리는 높이, 그리고  멀리 날며 하늘을 호령한다. 돼지를 통째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강한 날개와 발톱, 그 두꺼운 돼지의 살갗을 한 번에 찢어낼 수 있는 날카로운 부리는 독수리를 독수리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40년 또는 80년을 사는 독수리의 삶은 가혹하다. 40년을 살고 난 후 너덜너덜해진 날개의 깃털을 다 뽑아내고, 부서져 무디어진 부리를 다시 돋아나게 하기 위해 바위를 쪼아댄다. 닳아버린 발톱이 날카롭게 돋아날 때까지 바위를 긁고 또 긁는다. 살갗이 찢어지고 핏줄이 터지는 아픔을 부둥켜안고 여섯 달을 견뎌야 한다. 먹을 때마다 더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하늘을 날아야 한다.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야 한다.


어미의 혹독한 비행훈련을 견뎌내어 40년을 살고, 여섯 달의  피어린 아픔을 이겨내어 다시 40년을 살아내는 독수리. 오늘 내가 받은 말씀은

정녕 무섭다.


 새해가 밝았다. 어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날 아침이다.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고, 동해로 달려가 어제와 똑같은 해를 본다. 무언가를 다짐하고 약속한다. 사랑하고, 노력하고, 바치겠다고.


나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떠오른 해가 붉은빛을 다 잃을 때까지 잠을 잔다. 송구영신 예배에서 받은 말씀을 품고 새벽잠의 달콤함에 빠진다. 느지막이 일어나 졸린 눈으로 삶은 달걀을 먹으며 삶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배고프니까. 먹고, 먹었으니까 무엇인가 한다. 느낌이 살아나면 자판을 두드리고, 글이 이어지지 않으면 뒷산을 걷는다.


은퇴하면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산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자고, 걷고 싶으면 걷는다. 아무 계획 없이 차박 여행을 떠난다.

 이름 모를 시골의 정자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나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산길을 걷다가 걸어가야 할 날들을 가지런히 줄 세우기도 했다. 나름의 질서가 잡혔다. 자유로웠다.


언제나 글을 쓰는 것은 고통받는 일이다. 40년을 더 살고 싶은 독수리가 참아내야 하는 아픔과 가슴 저림이다.


작년 8월 어느 무덥던 날, 브런치에 몸을 끼워 넣었다. 그것은 아픔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이다. 브런치에 들어서는 것은 불볕이 가득한 사막, 폭우가 몰아치고 벼락이 뒤흔드는 들판, 감당할 수 없는 물결이 가득한 포세이돈의 바다이다.

무서운 시간 속이다. 그 속으로 들어섰다. 순전히 내 걸음으로. 글쓰기의 세상은 무서움뿐이다.



아내가 끓여준 떡국을 한 사발 먹었다. 맛있었다. 아내는 남의 속도 모르고 올해도 열심히 쓰란다. 호환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노트북을 열라고 한다.


도망치듯 외손자의 손을 잡고 교보문고에 갔다. 이 아이가  불쑥 내뱉는 말과 행동은 참 많은 글감을 던져 주고 있다.

- 할아버지는 교보문고가 좋아요? 저는 광장이 좋거든요. 재밌잖아요.

- 책에 담겨 있는 세상도 재밌단다.

- 히히히, 책에 세상이 담겨 있다고요? 그러면 책을 많이 읽는 누나는 세상 부자겠네요.

- 그렇구나. 너도 책을 많이 읽어서 세상부자가 되면 좋지.

- 싫어요. 저는 돈부자가 될 거예요.


오늘 여덟 살이 된 손자는 '친구의 전설'이라는 책을 들고 얼른 광장으로 나가자고. 하는데, 나는 베스트 에세이 진열대 앞에 서서, 아픔을 참고 있는 독수리들을 본다.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독수리들은 저마다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아무 독수리나 80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밤을 밝히는 날이 많았으면 한다. 가슴을 쥐여 뜯는 날이 많았으면 한다. 날개 쳐 오르는 독수리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났으면 한다. 그리고 쪼아대는 내 잔소리가 싫다고 한 달 동안 유럽의 하늘을 걷고 있는 아들의 걸음 곁에 어느 한 여인이 나란히 걸었으면 한다.


새해는 그런 '값진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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