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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Jan 14. 2024

21화 할아버지, 저도 출간 작가예요

사진 설명 : 예비 초딩 손자가 쓴 소설 '미친 경찰'의 일부. 





"할아버지, 제 책 사주실 거죠?"

딸네집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2학년 짜리 손녀가 인사도 하기 전에 통통 튀는 목소리로 건네는 말이다.

"네가 책을 썼다는 거야? 언제 썼는데?"

밑도 끝도 없이 책을 사달라는 손녀를 보며 궁금해서 물었다.

"아, 지금 쓰고 있는데 곧 책으로 나올 거예요. 꼭 사주셔야 돼요. 그래야 제가 인세로 75원을 받거든요."

손녀는 제 방으로 가서 노트 한 권을 들고 나왔다.


"선생님! 제 돈이 없어졌어요." 소은이가 소리쳤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손녀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 들어가서 문을 꼭 닫고 앉아 있더니 소설을 썼다고 보여주더라고. <수상한 골목>이라고 제목을 달아 놓았는데 아이들이 구미호가 되기도 하고,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그 후에도 <해피 베이커리>라는 이름으로 또 한 편 썼는데 빵집 주인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야. 물론 지구인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지만. 자기 아이가 심심해한다고 엄마를 볶아대어 같이 놀아줄 친구를 데리러 가기 위해 지구로 왔. 엄마 몰래 아들이 따라와서 빵으로 변장해서 숨어 있는데 읽어볼 만 해. 아빠도 한 번 읽어 봐요."

딸이 손녀의 노트를 내밀었다.

재빠르게 손녀의 소설 두 편을 훑어봤다.

"치기稚氣가 있기는 하지만 상상력과 구성은 그럴듯하네. 아이들이 쓰는 글이 다 그렇듯이 묘사는 없고 서사만 가득하지만. 책에 빠져 사는 효과가 있긴 있구나."

"그래서 아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동화작가님들의 지도를 받아보면 어떨까 해서 데리고 가봤어."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매주 한 번씩 글쓰기 지도를 받으며 4주 만에 한 편의 소설을 쓰게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20명의 아이들의 작품을 모아 ISBN을 받아 정식으로 출판하고, 판매금액의 10%를 인세로 나누어 지급한다고 한다.


 "할아버지, 선생님들이 주신 주제는 '미스터리'와 '학교 괴담'이에요. 둘 중에 하나를 골라서 쓰면 되는데, 저는 '미스터리'를 골랐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어떤 미스터리일까? 지난번처럼 엄마를 따라온 외계인 어린이가 빵으로 변장하고 숨어 있는 건가?"

 "할아버지, <해피 베이커리> 읽으셨어요? 이번에는 친구가 돈을 잃어버렸는데 누가 범인일까를 생각해 보는 내용이에요."

"그러면 학급 친구들이 돈을 찾아 주는 건가?"

"그렇게 쓰면 재미가 없거든요. '범인이 누구일까?'하고 추리하다가 어느 아이를 의심하는 내용인데 약간의 암시만 남기고 끝나요. 저는 범인을 밝히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암시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지도하시는 선생님이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매듭을 지으라고 가르친 모양이다.

"다음 주에는 책에 넣을 그림을 제가 직접 그려야 해요. 동화책에는 글 쓰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저희들이 쓰는 책은 저희가 직접 그려야 된대요. 저는 돈을 가졌다고 의심을 받는 친구의 음흉한 얼굴을 그리려고 해요. 엄청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그래. 엄청 재미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할아버지, 친구분들에게도 제 책을 사달라고 말해 주세요. 제 친구랑, 고모랑, 할머니에게도 사달라고 했어요."

"우리 KAYLA(손녀가 사용하는 영어 이름)는 인세를 많이 받겠네."

"그런데 할아버지, 책이 많이 팔리려면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고 선생님들이 알려 주셨어요. 여러 명이 쓰는데 제목이 좋아야 제가 쓴 소설을 많이 읽 되잖아요. 그래세 제목을 잘 지어야 해요. 그게 고민이에요."

선생님들이 제목의 중요성을 말해 주신 모양이다. 손녀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제목을 정한다고 한다. 절대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제 스스로 정하겠다고 한다. 손녀는 엄청 좋아했다.


<00층 나무집>을 읽으면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두 명의 아저씨들을 만나 흥미진진한 글쓰는 방법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신들의 세상도 인간들의 세상과 똑같다며 시시하다고 하면서도 신화가 주는 판타스틱한 내용에 몰입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아이 곁에 조금 앞선 듯한 책을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되었다. 손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읽어댔지만 남독濫讀은 아니었다. 우리들이 읽히고 싶은 책들을 읽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집 앞에 있는 교보문고에 가서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사 오기도 했지만 말이다. 책은 손녀의 세상을 열어 주었고, 지경을 넓혀 주었다.

  

"할아버지, 누나는 책을 써서 돈을 받는대요. 얼마나 받아요?"

누나가 인세를 받는다는 말을 들은 유치원을 졸업한 예비 초등학생 손자가 볼멘소리를 한다.

"누나가 글을 잘 써서 책이 많이 팔리면 돈을 많이 받지."

"그럼 5만 원도 더 받아요? 100만 원도요?"

세상에 욕심쟁이 손자는 자신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책을 읽는 누나를 보면서 책을 읽는 것보다 돈을 벌 생각을 하라고 히죽거린다. 이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블루마블 게임이다. 땅을 사고 호텔을 지어 돈을 버는 게 재미있다고 한다. 블루마블 게임을 하면서 돈의 가치를 알았고, 돈을 계산하기 위해서 산수算數를 배운 녀석이 어찌 누나가 돈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있겠는가.


"할아버지, 제가 쓴 소설이에요. 이렇게 쓰면 얼마를 받아요?"

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앉아 있더니 종이책을 내민다. <미친 경찰>이라고 제목을 달고 몇 줄을 써 놓았다.

"오호, JOE(손자가 사용하는 영어 이름이다)가 소설을 썼구나. 어디 보자. 잘 썼네. 그런데 경찰아저씨들 이름을 잘 지었네. '똥을 많이 싸니', '쉬 많이 하니', '방귀를 많이 뀌니'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각해 냈어? '설사 많이 하니' 의사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그럴듯하게 지어 놓았다.

"아, 그건 읽는 사람이 재밌으라고 한 거예요. 또 생각난 소설이 있는데요. 이번에는 '미친 선생님'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미친 건 아니에요. 다음에는 '미친 축구 선수'도 쓸 거예요."

"좋지. JOE는 아주아주 재밌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죠? 저도 누나처럼 인세를 받을 거예요."

"그럼 인세를 받기 위해 쓰는 거야?"

"당연하죠. 돈을 많이 벌어야죠."

"그런데 JOE야, 좋은 책을 써서 돈을 많이 벌려면 누나처럼 책을 많이 읽어야 해."

"할아버지, 저는 책 안 읽어도 다 생각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책은 포켓몬 하고 손흥민만 읽으면 돼요."

손자는 책을 많이 읽지는 않는데 생각하는 것이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다. 레고를 가지고 놀 때도 아주 기발한 장난감을 만들어내고, 가끔씩 제가 살고 싶은 도시를 그려놓는데 상상력이 참 대단하다.


"할아버지, 누나 책만 사주지 말고, 제가 쓴 책을 읽으셨으니까, 저에게 인세를 주세요. 빨리요. 100원요."

손자는 내 무릎을 짓이기며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

"돈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그래?"

"그건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거든요. 인세나 빨리 주세요."


 동화작가가 꿈인 손녀나,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차를 타고 다니겠다는 손자는 오늘도 엉뚱한 짓을 하면서 저렇게 크고 있다. 그 사이에서 어른들은 들볶이지만 사는 재미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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