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20여 년 전 갑자기 비에 젖어 걸었던 청도리 계곡 산행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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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데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를 핑계 삼아 늦잠을 즐기고 점심 무렵에 일어났다. 비는 내리고 빈대떡을 부쳐 막걸리나 한잔 마시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가 점심상을 차려 놓고 식탁으로 부른다.
"비 오는 날 모악산 마실길 걷기로 한 거 기억해요?“
언젠가 금구 ‘명품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말로 비 오는 날 모악산 둘레길이나 걸으면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다.
"콜~!"
작년 여름에 무지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었던 귀신사에서 시작하여 구성산 자락을 감고 돌아가는 ‘마실길’을 걷기로 한다. 임도를 걸을 거니까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비옷과 물 한 병을 배낭에 넣었다.
청도리 마을회관 주차장에 주차하고 귀신사 옆길을 돌아 싸리재로 올라간다. 삼층석탑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진다. 우비를 입고 거세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널찍한 임도를 걸어보면, 왜 비 오는 날이 왜 좋은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지난번에는 산딸기가 참 많았었는데…."
아내는 뭔가 아쉬운 모양이다.
"저기 저 동네가 선암마을이야. 김제시에서 전원마을로 터를 닦아 놓았는데…. 어떤가? 저 동네에서 한 번 살아볼까?"
발아래로 선암마을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당신이나 잘 살아보세요. ‘자연인’에도 출연해 보고.“
그렇게 희희낙락거리며 조용한 임도를 걷는다.
선암마을로 넘어가는 싸리재 정상에서 망설인다. 여기에서 금구 ‘명품길’을 따라 선암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귀신사로 돌아갈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 구성산 방향으로 걷는다. 구성산 갈림길까지 걷다가 상황을 봐서 구성산을 올랐다가 내려오거나, 동곡마을에서 청도리로 이어지는 계곡 길을 따라 걸어볼 요량이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너무나도 고요한 임도를 걷는다. 문득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 이리저리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본다. 두 달 이상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우며 모습을 감추었던 빗줄기가 세상의 생명체들을 기쁘게 울려주는 소리다. 초록의 나뭇잎을 온몸으로 껴안는 빗줄기의 사랑 어린 몸부림이요 함성이다.
빗속을 걸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자식 놈들 걱정이며,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을 동무 삼아 느릿하게 걸어 동곡마을로 내려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동곡마을에서 금산사로 가서 도로를 따라 청도리로 가기에는 길이 너무 멀어 동곡마을에서 청도리로 이어지는 계곡 길을 따르기로 한다. 10여 년 전에 걸어본 길이기에 자신 있게 들어섰다. 그런데 거기에 댐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대형공사를 하고 있다. 되돌아서려다가 일단 진행을 해보니 시멘트 도로가 있다. 한참 갔는데 더 이상 길이 없다. 전에 걸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지형을 참작하여 판단해 보니 조금만 가면 될 것 같다. 아내를 세워놓고 우거진 풀밭을 헤치며 길을 찾아본다. 풀이 우거지긴 했지만 희미한 길이 있다. 아내를 데리러 갔더니 그 와중에도 다슬기를 잡고 있다. 길은 풀이며 갈대에 묻혀 없어지기도 한다.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치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렇지만 조금만 가면 청도리다. 그냥 숲을 헤치고 돌파하기로 했다.
길은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지기는 하는데 풀이 우거져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비가 오는 관계로 반바지에 샌들 차림인데도 종아리가 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비탈로 희미하게 이어지던 길이 없어진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커다란 바위 위를 굴러 내린 물줄기가 커다란 담(潭)을 이루기도 하면서 시원스레 흘러간다. 길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계곡이 눈에 들어오고, 한여름에 이곳에 와서 놀다 가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식 실소(失笑)가 터져 나온다.
앞길을 막아버린 갈대숲을 헤치며 동물적 감각으로 나아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산에 다닌 경험으로 판단할 때 분명히 길이다. 다만 사람이 다니지 않았을 뿐 분명히 길이다. 원래 길이 없는 곳과 길이 있었는데 통행이 없어서 희미해진 길은 걸어보면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자신 있게 치고 나간다.
계곡물이 넘쳐 희미하게 이어지던 산자락을 삼켜버렸다. 무릎을 넘는다. 잠시 후에는 허리까지 빠지기도 한다. 아내는 새파랗게 질려 있다.
”이제 어떻게 해요?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 “
”괜찮아, 이 모퉁이만 돌아가면 돼. 그리고 죽어도 같이 죽으니까 괜찮아.“
나오는 대로 말을 해놓고 아차 했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이끌어 가는 사람은 자신감을 보여줘야 하고, 힘을 실어주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죽는다는 말을 꺼내버렸으니.
지난가을에 완주 대아리 수목원에서 삼정산으로 올라 왕사봉, 칠백이 고지를 돌아 운암산으로 내려오는 산행을 하였다. 조금 늦은 시각에 출발하여 칠백이 고지를 지나 운암산 직전에서 대아수목원으로 내려서려는데 어두워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아내가 무섭다고 했지만 지리를 잘 아는 까닭에 지름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조금 더 가서 확실한 길로 내려섰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배낭에 플래시가 있다는 것과 조금만 내려가면 수목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만용에 빠져 희미한 길을 따라 내려섰다. 가을 산이 무서운 것은 낙엽으로 인해 길을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간에 어두워졌고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를 안심시키고 플래시를 비춰가며 내려오는데 커다란 낭떠러지를 만났다. 아내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나 또한 등에 땀에 흘렀지만, 아내에게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길을 제대로 내려왔네. 이 절벽을 옆으로 돌아서 내려가면 제대로 된 산길을 만날 거야. “
떨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먼저 내려서고 플래시를 비춰 주며 아내의 발디딤을 짚어 주었다. 겁에 질린 얼굴로 무사히 내려왔다.
”맞아, 이 절벽을 내려오면 이 바위가 있었어. 아제 안심해도 돼. “
그렇게 말했지만,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다 스쳐갔다. 운암산 능선에서 수목원 앞 도로까지 내려서는 길은 길지 않기에 지금까지 내려온 것을 생각하면 곧 도로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밤중에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처음인지라 두려움이 살짝 밀려든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이내 제대로 된 산길을 만나 무사히 수목원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여보, 걱정 마. 여기만 돌아가면 되니까. 그리고 지금은 밤이 아니고 낮이잖아.“
물이 넘친 구간을 지나자 물은 발목 정도에 이른다. 나무 사이를 헤쳐가며 희한하게도 계곡을 건너가는 길도 찾아냈다. 하늘은 검은 구름이 잔뜩 몰려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걸을 만하지?“
”운암산보다는 괜찮네. 약간 싱겁기도 하고.“
숲에서 빠져나오면서 아내는 맑은 얼굴을 되찾았다.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분명한 산길을 따라 어둠이 내릴 무렵, 청도리에 도착했다.
”같이 죽지 않고 같이 살았네“
금산사 저수지에서 얼큰한 매운탕을 먹으며 우리는 손바닥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