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8 숲세권은 나의 힘

by 힘날세상

이사할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숲이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시가지가 잘 발달된 곳, 교통이 편리한 곳, 병원에 다니기 좋은 곳 등 여러 가지를 꼽았지만, 나는 소위 숲세권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아이들이 적당한 곳이 있다고 말해서 네이버 지도를 통해 확인해 보니 아파트 단지 뒤로 숲길이 이어지고 있다. 숲길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따라 이어지다가, 작은 마을로 내려갔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더 높은 봉우리로 이어지고 있다. 거리를 확인해 보니 15km가 훨씬 넘는다. 하지만 산 높이가 200m가 못 되어서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이 확 끌렸다.


늙은이들이 살아야 할 곳은 필요한 것들이 참 많기도 하다. 꼭 있어야 할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힘들지 않게 운동할 수 있는 나지막한 산은 꼭 있어야 한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면서 보니 노인들이 살기 좋은 곳이 많았다. 아차산, 일자산, 대모산, 우면산, 관악산, 앵봉산, 북한산, 도봉산 등 산자락이 동네까지 내려와 있는 곳은 모두 좋아 보였다.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걸을 수 있는 숲이 펼쳐 저 있는 동네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일까. 다리 힘이 좋은 사람은 더 높이, 더 멀리 걷고, 힘이 부치는 사람은 산자락을 따라 느릿느릿 걸을 수 있는 환경.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사 온 집 창을 열면 수목원이 발아래에 펼쳐져 있고, 수목원 가장자리를 따라 숲길이 이어지고 있다. 숲길을 걸어 시장에도 갈 수 있고, 아직 신선함이 남아 있는 아침나절이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생각하며 산책하기에 딱 좋은 산길이 두 시간 정도 걸어야 할 만큼 이어진다. 사실 아직은 조금 싱거운 수준으로 등산보다는 가벼운 산택길이지만, 심장이 쫄깃거릴 만큼 가볍게 달리기를 하고 나면 흐르는 땀으로 독소가 다 빠져나올 정도의 상쾌함이 몰아쳐오는 즐거움이 솟아나는 숲길이다.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에 주변 산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집에서 걸어서 산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숲으로 들어가니 아주 부드럽고 넓은 숲길이 걸음을 이끈다. 운동시설이 있는 봉우리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전주의 완산칠봉보다 완만하고 걷기에 좋았다. 사실 좀 싱겁기도 했다. 왕복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다음에는 더 걸어 **봉까지 왕복했더니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산길을 걷는 걸음은 점점 길어졌다. **봉에서 마을로 내려가 다시 **성, **봉까지 돌아왔더니 16km에 5시간 30분이 넘게 걸었다. 아직은 다리에 힘이 있어 산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수리산을 오르다가 영인산, 두타산, 광덕산, 만뢰산을 찾아서 돌아다녔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북한산 비봉 능선에 홀릭되기도 했다.


산길은 언제나 내 마음에서 시작한다. 20대 때부터 시작한 산행은 힘들었던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었고, 가라앉은 의욕을 일깨워준 원동력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이 험한 산길을 오르고 나면 어떠한 어려운 일도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돋았다. 힘들 때마다 한 걸음 더 걸어야 한다는 끈기도 은근히 솟아났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평안했다.


생활의 모든 것은 산에서 시작했고, 산으로 수렴되었다. 주말이 되면 산길을 걷는 생각만으로 무아(無我)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날마다 **봉을 걷고 싶었다. 그러나 늙은이의 생활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쉽지 않다. 일주일이면 두어 번 정도만 산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아침마다 창문 너머로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뎌진 마음을 씻을 수 있다. 숲이 주는 선물이다. 수목원 푸른 숲에서 솟아나는 생생한 기운은 잿빛 도회지의 무거운 기운을 걷어내었다.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의 날갯짓에서 활력이 살아 있는 것을 본다.


한여름에 서울 둘레길 대모산 자락을 걸었다. 여름의 땡볕이 무색하리만큼 두껍게 펼쳐진 녹음(綠陰) 아래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허리가 굽어 있었고, 주름이 얼굴을 이루고 있었다. 배낭에 넣고 다니는 초콜릿을 드리며 곁에 앉았다.


ㅡ지나가는 사람들 발걸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요.

힘들게 살았던 날들을 돌아보면 허망하다고 했다. 인생이 이런 것인데 무엇을 위하여 앞만 보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ㅡ여기에 앉아 있어 보면 다 부질없는 일이었어요. 자식들 입에만 넣어주었던 고기를 내 입에도 넣었어야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으니...... 허망하죠.

노인은 손에 쥐어 준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ㅡ저렇게 힘차게 걷도 있는 사람들만 보아도 내가 걷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가 좋아요.

할머니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모산 꼭대기까지 올라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삽시간에 근력이 무너졌고, 이제는 숲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늙어서는 다리 힘으로 산다고 한다. 다리 힘을 기르는 것은 운동이 제일이다. 나이 든 노인네에게 가장 적절한 운동은 걷기이다. 늙을수록 걸어야 한다. 노인들이 숲세권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숲은 그대로 활력이다. 녹음이 짙게 우거져 있는 숲을 걸어야 한다.


작년 여름에 여섯 살짜리 손자와 함께 광교산 형제봉을 올랐다.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올라가는 손자를 보면서 어디선가 파랑새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숲세권에 사는 것은 행복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