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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Jun 03. 2024

17 5월의 끝자락에 서다

               

비틀거려 걸었던 5월, 힘들여 열었던 노트북




5월을 준비하던 하늘은 미세먼지에 짓밟혀 뿌옇게 울고 있었고, 세상을 덮어 누르는 미세먼지보다 더한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찌어찌해서 하나의 단어로 묶어보자면 상실감이 아닐까.      


브런치에 들어서기 위해 블로그에 석 달 열흘 동안 매일 한 편씩 글을 썼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매일 밤 불을 밝혔다. 백일을 보내고 브런치 문을 두드렸더니 바로 열어 줬다. 흥분했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힘이 솟았고, 그 힘은 내 시선의 끝을 뾰족하게 가다듬었다. 글감을 향한 직선적이고도 날카로운 관찰력이 새살처럼 돋았다. 세상을 모두 노트북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글빚에 몰릴지라도 힘이 날 것이라고, 결승골을 넣은 선수처럼 뛰어올랐다.       


세상은 여전히 으르렁거렸고, 과일값은 금값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식탁에 과일을 올려놓았고 커피를 내렸다. 손주들은 시시덕거리며 학교로 갔고, 광장을 비고 다니며 뛰어놀았다. 아들은 항상 집필에만 몰두했고, 연애 사업은 늘 부진했다. 건강보험료와 관리비, 카드값은 매달 어김없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나는 허무하고 맹랑했다. 무엇이었을까. 모든 것은 여전한데도 카보드 앞에 철옹성을 쌓아 놓은 것은, 그 상실의 강은.


특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봄을 짓눌렀다. 꽃이 피었으나 나는 청맹과니였고, 담록의 속삭임이 온누리를 휘감았으나 어둑시니였다. 도대체 감흥이 나지 않았다. 류머티스 관절염 환자처럼, 공황장애 환자처럼 손가락은 굳어버렸고, 키보드 앞에서 자신감을 잃었다.      


cut off였다. 연극에서 갑자기 조명을 꺼서 장면을 전환하는 것처럼 느닷없이 글이 써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쓰고 싶지 않다는, 동력을 잃었다는 알량한 변명 같은 것도 일정 부분 섞여 있었다. ‘글태기’라는 말을 잠깐 생각했다가 지웠다.      


산으로 돌아다녔고, 남덕유 서봉에서 선배와 둘이서 백패킹을 하며 늙어가는 것을 한탄했다. 선배는 저것이 은하수라고 했고, 나는 은하수에서 여러 번 직녀를 만났다고 킬킬거렸다. 밤새 궤변을 늘어놓았다. 고희古稀에 무슨 백패킹에 궤변이 냐고 떨떠름하면서도 선소리치는 건 언제나 나였다. 라면을 끓였고, 밤하늘과 술잔을 나눴다. 불콰한 시간을 건너며 삶의 허리띠를 풀었다.      


그날, 서봉의 은하수에 젖었던 그날, 선배와 비틀거렸던 횡설수설 때문이었는지, 별빛이 넘쳐나던 토옥골의 진기眞氣 때문이었는지, 또는 덕유능선을 넘던 바람의 초록초록한 노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형에게 쏟아냈던 푸념들이 토옥골 하산길에서 부끄럽게 보였다. 서봉 꼭대기에서 밤새도록 내동댕이쳤던 것들은 모두가 내 글의 일부였다.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노트북을 덮고 책을 읽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여러 번 읽었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곽재구의 산문집, 미당의 시 전집, 장미숙의 의자, 생각을 품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베르베르의 제3의 인류, 오긍의 정관정요 등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무작위로 뽑아 읽었다. 읽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잤다.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잤다. 정말 재미가 없었다. 나중에는 우리말 분류사전을 아무 페이지나 펴놓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읽었다. 폐인의 흉내를 냈던 것 같다.  글쓰기가 무서웠다.     


하루종일 산등성이를 걸었다. 다리에 힘이 다 빠져나가고, 갈증이 온몸을 휘저을 즈음, 갑자기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유방암으로 죽어가는 환자 미야노가 생각났고,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나’가 떠올랐다.  데이비드 소로까지.


김연수 작가는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답하려는 것은 욕심이라고 했다. 그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자신의 질병을 불행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인생의 하나라고 받아들이는 미야노는 새로운 시작을 보았다고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을 때 ‘나’가 얻은 해법은 ‘글은 내가 쓰는 게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애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궁금했을 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봤을 뿐이다. 그러자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지고 문장들이 이어졌다.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 후에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놀라운 것들은 다 무엇인가? 답을 제시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와 지켜보고 돌보는 사람이 될 때 모든 질문은 감탄으로 바뀐다. 이 놀라운 것들은 다 무엇인가! 질문을 하는 것도 나의 마음, 감탄을 하는 것도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에 따라 너무나 많은 삶이 입을 다물었다가 또는 짝 펼쳐지는 것이다.

                                                  -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나는 무수히 질문했고, 나 스스로 대답하려고 했었다. 얼마 큼의 대답을 한 것 같다는 자만의 포화를 받았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이라는 포충망에 빠져든 것이었다.


시간은 제자리를 걷는 듯했으나 세월은 성큼성큼 달아났다. 5월은 멍하니 서 있는 듯했지만, 어느덧 꽁무니를 보였다. 혼란에 빠졌던 5월의 끝자락에서 그나마 독후감, 그리고 수필 몇 편을 썼다.  그것은 내면을 바라보려는 안간힘이었다.


글쓰기에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위한 글쓰기 말이다. 그렇게 5월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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