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7화 노을

by 힘날세상
전주 삼천의 해질녘


바람이 좀 불어도 좋은 날

삼천을 따라 황혼을 걷는데

여름이 올 거라고,

비가 내리고 끈적이는 더위가 가득할 거라고,

그래서 쉽지 않을 거라고

해가 넘어가면서

남기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린 시절,

지평선을 넘어가던,

기울어지는 해는

꼭 얼어붙은 신작로를 밟고도

아직 다 못 거둔 햇살 자락을

텅 빈 들판 위로

자박자박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루 종일 고샅을 뛰놀던 바둑이도 추레한 걸음으로 돌아가고

초가지붕 굴뚝 위로 밥 짓는 연기만 피어오르던 해 질 녘에

손등이 쩍쩍 갈라지도록

팽이 치고,

썰매나 타고 다니던 아이들은

손을 호호 불면서도

담벼락에 남아있는 저녁놀을 놓지 못했다.

배고파도 잘 놀았고,

컴퓨터, 휴대폰 없이도

하루 종일 참 재미나게 놀았었다.


해넘이는 지금도 아름다운데

바라보는 건

이제 희미할 뿐이다.

도대체 걸어 다니는 길을 막아 세워놓은 자전거에 어리둥절한 늙은이들은

침침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보이는 것마다 흐릿하게 보이고,

생각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굽어가는 몸은 여기저기 군시러운데


해마저 그렇게 넘어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6화 비오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