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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비오는 날에

by 힘날세상
체스의 정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초딩 2학년 손자가 도서관에서 혼자 썼다고 보내온 시


비가 내리는 오후 처인성을 걸었다. 작고 낮은 토성벽을 따라 걷는데 그냥 허전함이 밀려왔다. 나는 성벽을 따라 걷는 시간을 즐긴다. 성을 쌓은 사람들, 성벽 위에서 파수를 서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무사귀환을 고대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애환을 그려본다.


성城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성벽에 선 사람들이나 성벽 아래에 선 사람들 모두, 두고 온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으리라. 이별의 아픔을 품고서.


가느다랗지만 빗줄기는 성벽을 파고들었고, 성벽 위에서 나는 값싼 센티멘털에 빠져들었다.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도 일었지만 비를 핑계 삼아 고희의 낡은 마음을 풀어놓았다. 신파조新派調의 리듬 같은 것들에 젖어들었다. 비는 추렷하게 성벽을 두드리는데, 제 몸을 일으켜 하늘을 바라보는 나무들 사이로 가라앉는 하늘에 기대어 보려고 했다. 그렇게 흔들거리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ㅡ할아버지, 제가 학교 도서관에서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다가 핸드폰에 쓴 거예요. 비 오는 것을 보니까 아빠 생각이 나서요.

손자가 문자를 보냈다고 전화했다.


아빠가군대로돌아갔다

나랑잘놀아주던아빠

비가내렸다.

덩달아내마음한구석에서도

비가내린다.



'오늘 하늘은 비를 내려 여럿의 마음을 흔들었구나'


어떻게 비와 아빠를 연결했을까. 제 누나가 동화책 발간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동화를 쓰고 있을 때, 옆에서 이것저것 지적하던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늦게 한글을 배웠고, 배우고 난 후에 봇물 터지듯 책을 읽어대더니 그 힘이 이제 솟아나는가 보다.


아이는 애써 울음을 견뎌내고 있었다. 빗줄기에 힘입어 흐릿하게 둘러가던 장막을 다 걷어버렸다. 신파조며 센티멘털이며 다 내동댕이쳤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대대장 직무교육을 마치고 며칠 휴가를 받아 같이 지내던 아빠가 부대로 복귀하던 날, 차문을 붙잡고 끝내 울고 말았다더니 며칠을 아빠 생각으로 채우고 있었나 보다. 오죽했으랴.



비는 고려 때 쌓았다는 이 작은 처인성에만 내린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울 어느 곳에만 줄기차게 쏟아진 게 아니었다. 아홉 살 어린아이의 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얼마나 쿵쾅거리며 모질게 쏟아졌을까. 안타까웠다. 가슴에 실금이 가듯 아팠다. 어린 마음으로 받아낸 그 아픔의 양이 얼마였을까. 누구도 헤아려 나누지 않았던 그 여리디 여린 마음으로 맞섰던 빗줄기는 어땠을까.


ㅡ아주 잘 썼네. 어떻게 이런 시를 썼어? 시를 쓰면서 울지 않았어?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힘들게 말했다.

ㅡ울지는 않았는데 아빠가 정말 보고 싶었어요.

ㅡ그런데 왜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을까?

ㅡ읽을 때 답답하죠? 제 마음도 그만큼 답답해서 일부러 그랬어요.



이렇게 여물어가는구나. '초딩 인생 처음 물리'를 읽는다며 물리학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는 그냥 맞장구를 쳐주었고, 체스 국가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체스의 정석'이라는 책을 펴놓고 체스판 위에 기물들을 놓아보는 것을 보고 등을 다독여 주면서도 괜찮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늙은이가 먼저 무너졌다. 눈물이 아니고 빗물이라 둘러대며 울었다. 갑자기 웃기도 했었으니 누가 봤다면 노망 난 늙은이라고 손가락질하며 혀를 찼을 것이다.


비는, 오늘 좀 유난스럽게 내렸고, 도서관에서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던 아홉 살 손자는 군복을 입고 먼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빠를 바라보며 스스로 자라고 있었던 게다.

제 마음 한구석에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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